겸손처럼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 덕목도 없을 것이다. 겸손은 기독교에서 매우 강조되는 덕목이지만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겸손인지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한국 문화에서 말하는 겸손과 기독교의 겸손을 혼동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겸손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마태복음 16:24)" 라는 구절이 종종 맥락에 맞지 않게 잘못 인용되고, 사람들의 칭찬에 "아니에요~" 내지는 "아유 저는 실력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 겸손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태복음 11:29)" 그 예수님께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바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말한다.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 (사도행전 20:19, 새번역)" 그 바울은 같은 20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 (사도행전 20:35, 새번역)" 한국 문화에서라면 "내가 한다고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게 많았을 줄로 압니다." 같은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바울은 자기가 모든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였다고 당당히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식이 밖에 나가서 "저는 능력도 없고 부족하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며 자기 비하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자녀가 스스로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런 것은 참된 겸손이 아니라 짝퉁 겸손이요 겸손의 모조품이다.

하지만 이것을 오해해서 시험을 잘 본 후에 모든 반 친구들 앞에서 "나는 너네들보다 똑똑해" 라고 한다거나, 사업에 성공해서 큰 돈을 번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 라고 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상 맞는 말 같아 보이는데 왜 사실이 아니라는 걸까?

기독교인은 자기의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내가 이룬 그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 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잘 해서 일이 잘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에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키시며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요한복음 5:19, 새번역)" 라고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 새번역)" 라고 하셨다. 바울이 한 말을 보면 더욱 이해가 잘 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5-7, 새번역)"

각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도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더라도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씨앗을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정리하자면 첫째로, 사람의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둘째로,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생각하고 강조하는 데에서 겸손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둘째만 강조하다 보면 내가 가진 능력을 깎아내리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반대로 첫째만 강조하다 보면 내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 첫째와 둘째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건강한 겸손을 이루는 길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탄식하며 외친 말이 좋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불가강야(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더니, 정말이지 억지로 할 수가 없구나!"
한번 상상해보자. 콜라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전용 잔을 산다. 콜라 재료의 원산지에 따라 콜라 가격에 차등을 둔다. 여럿이서 콜라를 마실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에게 콜라를 따라 줄 때에는 두 손으로 따라야 하며 잔이 비지 않은 상태에서 콜라를 더 따라주면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숙성 년도에 따라 저급 콜라와 고급 콜라가 구분되고 고급으로 갈 수록 가격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고급 콜라를 마시는 것이 상류 사회의 척도인 양 취급되며 나중에는 콜라를 마시는 것이 정신 수양의 척도로까지 인식되어 콜라도(道)라는 것이 생겨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콜라를 술이나 차로 바꾸면 그 순간 모두 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술과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문화 요소라는 뜻이다. 시선(詩仙), 시를 쓰는 신선이라고까지 불렸던 이태백은 對酒還自傾(대주환자경, "술을 대하니 다시 또 술을 기울이네" 라는 뜻)이라는 시구를 썼고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잠에서 깨려고 잘라버린 눈꺼풀은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술과 차는 이렇게 종교에까지 연결되는 음료인 것이다. 이태백이 시선(詩仙)이라고 불렸던 것과 달마 전설에서 알 수 있듯 도교의 음료는 술이고 불교의 음료는 차다.

술과 차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술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지만 차는 정신을 맑게 한다. 술은 사람을 졸리게 하지만 차는 잠이 확 깨게 한다. 술을 마신 사람은 감정적이 되지만 차를 마신 사람은 이성적이 된다. 그래서 술은 밤의 음료이고 차는 아침의 음료이다. 술과 차라는 이 두 음료가 지금까지 좁게는 한국의, 넓게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두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대표해 왔다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한국에 술도 차도 아닌 새로운 음료가 들어왔다. 잠이 확 깨게 하는 것은 차를 닮았는데 많이 마시면 감정적으로 흥분되게 하는 것은 술을 닮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차의 특성이 있는가 하면 중독되게 만드는 술의 특성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색깔은 차처럼 은은하지도 술처럼 투명하지도 않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이다. 바로 커피다.

커피는 맨 위에서 언급했던 술과 차의 모든 특성을 갖고 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한 전용 잔이 있고 커피 원두의 원산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세련된 문화로 취급되며 다도(茶道)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커피를 만드는 도구들은 단순히 도구를 넘어서 예술의 언저리를 건드리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술이 도교와, 차가 불교와 연결되듯 커피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연결된다. 커피는 한동안 이슬람 문화권의 음료였다. 이슬람권에서는 종교 행사 중에 잘 깨어있기 위한 용도로 커피를 애용했고, 이슬람과 사이가 안 좋았던 유럽에서는 당연히 커피를 싫어해서 악마의 음료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야사에 따르면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커피를 축복한 이후로 기독교권에서도 커피를 널리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임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니 유럽과 한국의 커피 역사는 약 300년 정도 차이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문화의 한 요소이며 종교로까지 이어지는 음료인 커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술과 차가 근대까지의 한국의 두 생활양식을 대표한다는 가설이 맞다면 현대 한국에는 술도 차도 아닌 커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존재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한국의 커피스러운 생활양식이란 뭘까. 머릿속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많은 대답 중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탈진'을 꼽겠다.

커피는 탈진한 사람들이 내일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쓸 때 사용하는 음료다. 대학생들은 시험기간에 밤을 새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똑같이 카페인이 들어있다고 해도 밤을 새기 위해 한밤중에 차를 마시는 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나와서 본인들 표현대로 하자면 '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몇백 밀리리터씩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신다. 그러다가 카페인에 내성이 생겨버린 사람들은 커피를 넘어서서 박카스나 레드불 같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기 시작한다.

오해를 풀기 위해 밝혀두자면 한국에는 커피를 음미하며 즐기는 애호가들이 물론 매우 많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음료를 마시는 전체 인구 중 탈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용도로 그 음료를 마시는 사람의 비율이 술이나 차보다 커피의 경우에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위에 적었듯이 낮의 음료는 차였고 밤의 음료는 술이었다. 낮술이라는 단어가 따로 만들어졌어야 했을 정도로 술은 밤에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는 낮에나 밤에나 다 마실 수 있지만 밤에 차를 마실 때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잘 자기 위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낮에는 잘 깨어 있고 밤에는 잔다는 극히 상식적인 생활 양식이 술과 차에 모두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커피는 그것을 깨 버렸다. 밤에는 자야 하는데 억지로 깨어있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그러니 늦게 자게 되어 다음날에 피곤해지고, 피곤하니 점심 때에 졸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신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모든 것이 경쟁적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모습이다. 지금의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신다. 현대 사회가 한국에서 커피의 양적 팽창은 이루어냈지만 사람들이 커피를 진정 즐기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 1927-1989)라는 미국의 유명 작가가 1982년에 쓴 Down the River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네 문화는 커피와 휘발유 위에서 돌아간다. 첫째 것의 맛이 둘째 것과 같을 때가 종종 있다. (Our culture runs on coffee and gasoline, the first often tasting like the second.)" 이 말은 현대 한국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의 커피는 지금도 종종 휘발유 맛인 것이다.

제목은 거창하게 썼는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면서 비전공자이니까 틀려도 창피하지 않다는 뻔뻔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꽃들도" 라는 CC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花も(하나모)" 라는 일본 찬양인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구전되어 온 찬양이라고 한다. 멜로디만 들어보면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듯한 전형적인 일본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매우 일본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다음 가사이다.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花も雲も風も大海も)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奏でよ奏でよイエスを)


꽃, 구름, 바람, 넓은 바다 순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다. 꽃보다는 구름이 크고 구름보다는 바람이 더 활동 범위가 넓다. 바람과 바다는 비교하기가 애매한데 그래서인지 굳이 "넓은"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이게 왜 특이하냐 하면 일본 문화는 이어령 씨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에서 볼 수 있듯 큰 것을 작게 만드는(응축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해당 책 초반부에 언급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하이쿠를 보자.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동해에서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 게와 눈물 순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령 씨는 이를 두고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꽃들도"의 가사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 전형적인 일본 노래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가사가 다음과 같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불러보면 확실히 일본 정서가 더 잘 느껴진다.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작은 꽃들도

(海も風も雲も小花も)


그러면 왜 "꽃들도" 에서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단어들이 배치되었을까? 노래나 시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사고방식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에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감정으로 옳은 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면 시인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이다.) 이 노래는 찬양이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6)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령 비움이라는 말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작업이고 명상은 내 속을 비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묵상은 있어도 명상은 없다. 채우려면 꽃이 구름과 바람과 큰 바다가 되어야지 바다가 작은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꽃들도"의 가사 순서가 저렇게 일본적이지 않은 순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 왜 마지막이 넓은 땅이 아니라 하필이면 넓은 바다여야 했을까. 다음 구절이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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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유튜브에서 꽤 유명한 기독교 강사가 있다고 해서 동영상을 찾아봤다. 보면서 이 사람은 기독교를 신앙이 아니라 사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신앙인은 우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는 소리를 듣고서 동영상을 꺼 버렸다. 저렇게 교조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성경의 주요 인물들도 슬픔과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다윗이 그랬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시38:6)" 바울도 그랬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결정적으로 예수님도 그러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26:38)"


기독교를 사상으로,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면 저 유명한 유튜브 강사처럼 슬픔에 빠진 사람의 신앙을 무시하게 된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은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그 유명 기독교 강사의 동영상이 여기저기 퍼지고, 그 강사가 방송에도 초대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참 씁쓸하다.

갑자기 '기독교 교리를 수학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시도해 봤습니다.

정의역이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집합이고 공역이 참과 거짓인 함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함수의 이름은 ‘구원’입니다. 수식을 사용해서 써 보면

함수 구원:X -> Y
X = {x | x는 사람}
Y = {참, 거짓}

이렇게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원소나열법으로 쓸 수는 없기에 집합 X를 정의할 때에는 조건제시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함수는 사람이 대입되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를 알려주는 함수입니다. 예를 들어 '구원(철수) = 참' 이라면 철수는 구원받은 것이고 '구원(철수) = 거짓' 이라면 철수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의 집합을 정의역으로 가지는 함수이기 때문에 철수 영희 갑돌이 갑순이를 다 대입해 볼 수 있지만 바둑이는 대입할 수 없습니다. 로그(log)에 음수를 넣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원(바둑이)'는 정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 하면 구원받는가?’ 입니다.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면 고등학교 집합과 명제 시간에 배운 명제함수가 필요합니다. 명제함수란 ‘p(x) 이면 q(x) 이다’ 형태의 문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p(x) 이면 구원(x) 이다

에 해당하는 p(x)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착함(x) 이면 구원(x) 이다' 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공리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주어진 이론 체계 안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면서 증명이 필요없이 참으로 인정되는 명제를 공리라고 하고, 그런 공리들을 모아놓은 것을 공리계라고 합니다. 수학에서는 증명을 할 때 어떤 공리계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한데,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의 공리계는 성경책이 되겠습니다. 공리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지금은 공리계에 있는 명제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참이라는 것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구원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찾고 싶은 구원의 조건인 p(x)에 대해 성경은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사도행전 16:31)” 라고 말합니다. 이건 성경이라는 우리의 공리계 안에서는 따질 필요 없이 참입니다. 이 구절에서 용어를 그대로 따 와서, 어떤 사람이 주 예수를 믿는지의 여부를 알려주는 ‘믿음’이라는 함수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믿음(x) 이면 구원(x) 이다

예를 들어 x에 영희를 대입하면 "믿음(영희) 이면 구원(영희) 이다", 즉 "영희는 주 예수를 믿는다. 그러므로 영희는 구원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나? 즉 위의 p(x)에 믿음(x) 대신 들어갈 수 있는 함수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그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은근 재미있네요 ㅋ
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이 다 다르듯 구미권의 나라들도 다 다르니 그네들을 서양이라고 퉁치려면 참 무리가 따르겠다 싶지만, 자기들끼리 유럽 연합이니 나토니 하는 것을 만들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서양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중일 3국이야 좋으나 싫으나 역사로 엮여 있는 나라들이고, 동남아 국가들과도 아세안 플러스 한중일 해서 꽤 가깝게 지내니 동양이라는 어정쩡한 말도 아주 못 쓸 말은 아닐 것이다. 하여간 지금 쓰려는 것은 논문이 아니라 일요일 오후의 끄적임이기에 이렇게 모호한 용어를 있는 그대로 모호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원래 모호한 것에 대해 말해야 어줍잖은 지식으로 썰을 풀고 약도 팔 수 있는 법이다.

서양의 숫자는 7이다. 일주일은 월화수목금토일 7일이다. 계이름도 도레미파솔라시 7개다. 카지노에서는 777이 나와야 대박이다. 무지개는 서양에서도 나라에 따라 5개, 6개라고 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빨주노초파남보 7색이다. 백설공주 옆에는 여섯도 여덟도 아닌 일곱 난장이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7이 좋은 숫자이다 보니 7에서 하나가 빠진 6은 나쁜 숫자다. 그래서 666이 악마의 수가 되지 않았나.

반면 동양의 숫자는 5다. 계이름이 궁상각치우든 중임무황태든 하여튼 5개다. 윷놀이에도 도개걸윷모 5개의 경우가 있다. 얼굴을 찌푸려도 오만상을 찌푸리지 육만상이나 칠만상을 찌푸리지는 않는다. 화투를 쳐도 새를 다섯 마리 모으면 어원이 小鳥(kotori) 이든 五鳥(gotori) 이든 어쨌든간에 고도리가 돼서 좋다. 무지개도 오색무지개라고는 해도 칠색무지개라고는 안 한다. 5가 이렇게 좋은 수인데 방위는 동서남북 네 개 밖에 없으니 어쩌지 하다가 어거지로 중앙이라는 개념을 끼워넣어서 어쨌든 오방을 만들어서 오방색을 정한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멋진 산들이 많은데도 꼭 다섯 개씩만 모아서 오악이라고 한다. 오곡밥은 있어도 육곡밥, 칠곡밥은 없다. 하다못해 독수리도 오형제여야 했고 후레쉬맨에서도 옛날 옛날 먼 옛날에 하필이면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저 멀리로 사라졌어야 했다. 미국에서 만든 파워 레인저도 다섯 명이지만 그건 미국에서 일본 전대물을 수입해가서 그렇다.

사족을 달자면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가지 힘이 하나로 모인 캡틴 플래닛은 숫자가 5이지만 굉장히 서양적인 만화인데, 왜냐하면 이 만화의 5는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다가 마음을 덧붙여서 나온 숫자라서 그렇다. 비슷한 개념이 적용된 것으로 프랑스 감독 뤽 베송의 영화 제 5원소가 있다.

다시 돌아와서, 5와 7 두 숫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서양의 7은 기독교에서 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7일동안 만드셨기에 7이 좋은 숫자이다. 동양의 5는 오행사상에서 왔다. 오행에는 목화토금수 다섯 개념이 있다. 나무, 불, 흙, 쇠, 물이 서로 물고 물린다. 행성 이름도 얘네들을 따서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다. 그래서 뒤쪽 행성들은 붙일 이름이 마땅치 않아 서양에서 쓰는 그리스 신 이름을 번역하는 바람에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같은 이질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근대에 서양 달력을 쓰게 됐는데 일주일이 7일이니 목화토금수를 다 가져다 붙여도 이틀이 비어서 해와 달까지 끌어들여 일요일과 월요일을 만들어야 했다.

요즘 우리는 오색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으로 부르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동양의 5색 무지개가 서양에서 7색이려면 몇몇 색들이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어의 '푸른색'이 영어에서는 파란색과 초록색 두 개로 갈라진다. 우리가 신호등의 초록색 불을 보고 "야 파란불이다 빨리 건너자" 하는 게 다 그런 흔적이다.

동양 전통이 5, 서양 전통이 7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숫자는 뭘까.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 5나 7중 하나만 고집할수는 없다. 5만 고집하기엔 7이 우리 삶 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 반대로 5를 다 버리고 7로 갈아타자고 하는 것은 우리 문화 속에 5가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결국 두 숫자 중 무엇을 고르더라도 포기한 것 때문에 잃는 것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5와 7을 평균내서 6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건 꽝이다. 5 입장에서 보면 6은 쓸데없고 거추장스러운 것 하나를 더 달고 있는 숫자다. 더 심각하게도 7 입장에서 보면 6은 666에서 볼 수 있듯 악마의 숫자다. 6이 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옛말따나 죽도 밥도 아니다. 연예계에서 이런 식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가 국내 인기도 잃고 해외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 얻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이러느니 차라리 5만 하든지 7만 하든지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낫다. 어줍잖은 퓨전 음식을 만드느니 차라리 한식과 양식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좋은 것과 같다.

둘째는 5냐 7이냐라는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5, 7)이라는 이차원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5, 7)이 되면 5한테는 "나는 x축으로 5에요"라고, 7한테는 "나는 y축으로 7이에요"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을 만족스럽게 포함하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방식은 또다른 문화권을 새로 접하더라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차원만 늘리면 되니까.

그런데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해야 (5, 7)이 될 수 있을까.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5와 7 양쪽 모두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잘 알아야 그 다음에 뭘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때문에 영어공부를 하면서도 5때문에 국문학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쇼팽과 베토벤을 들었으면 대금 산조도 좀 들어봐야 하고, 유럽 배낭여행 갔다 왔으면 국내 여행도 다녀봐야 한다. 아무리 내가 속해있는 문화권이라고 해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그 다음으로는 어느 하나도 버리지 말고 둘 다 잘 잡고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양쪽을 잘 알아도 사람이라는 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으로만 쏠리기가 쉽다. 그래서 5로 쏠리면 국수주의, 요즘 인터넷 용어로 국뽕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7로 쏠리면 사대주의자나 자국 혐오자, 요즘 말로 국까가 되게 된다. 양쪽 예 둘다 SNS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게 적었지만 결국 줄이면 지피지기(知彼知己) 네 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5와 7이 전쟁중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자병법을 인용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어쨌든 사실 지피지기(知彼知己)만 보는 것 보다는 다음에 오는 네 글자까지 함께 봐야 더 의미심장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절대로 위태롭지 않다. 이 말대로라면, 반대로 5만 알거나 7만 알면 언젠가는 반드시 위태로운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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