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는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다 주어진 문제와 일부만 주어진 문제, 둘 중 하나에 속한다. 필요한 정보가 다 주어진 문제란 수능 수학 문제 같은 것을 뜻한다. 쉬운 문제도 있고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어쨌든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문제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다. 학교에서의 시험은 이런 종류의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을 가려내는 데에 특화되어 있고, 그런 학생을 우리는 똑똑하다고 부른다.

필요한 정보가 일부만 주어진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이다.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할까 말까,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지원할까, 갖고 있는 주식이 최근에 10% 올랐는데 이제 그만 팔까 아니면 더 쥐고 있을까, 등등.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딸린 변수가 너무 많아서 모든 것을 사전에 다 분석하기가 불가능하고, 설령 분석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어느 날 청혼을 받았고, 고민을 하며 결혼에 대해 연구한 후 최종적으로 그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그 때는 이미 7년이 흘러서 그 여성이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자녀까지 두고 있던 때였다고 한다.

이렇게 불충분한 정보 하에서 좋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판단이 좋다고 부른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판단이 좋은 것은 아니며, 똑똑하기보다 판단이 좋기가 더 어렵고, 똑똑한 것 보다 판단이 좋은 것이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똑똑하기만 하고 판단력이 안 좋은 사람을 가리키는 헛똑똑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판단력은 정규 교육 과정에서 깊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몸에 익는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날카로운 본능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판단력을 키우는 데에 참 좋은 과목이 있다. 역사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을 내렸는지를 보면서 간접 체험과 생각을 통해 판단력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초중고의 역사 교육이 대체로 지식 전달 및 암기 위주인 것은 아쉬운 일이다. 역사 과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내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몸에 익히는 것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는(學) 것 뿐 아니라 익혀야(習)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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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자려는데 목이 따갑고 눈이 가려웠다. 먼지가 많은가 하고 창문을 열자 갑자기 공기청정기가 세게 돌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눈이 엄청 따가워졌다. 최루탄이었다. 전철역 한 정거장 건너에서 쏜 최루탄이 바람을 타고 우리 동네까지 온 모양이었다.

11월 12일 화요일 밤에 홍콩 중문대학에서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천 발 넘게 쐈다고 한다. 훈련소에서 받았던 화생방 훈련이 생각이 났다. 학교 캠퍼스 한 곳에 최루탄 천 발이 떨어지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건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사용하는 폭력은 최소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홍콩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시위대가 전철역으로 도망가자 역 입구를 다 막은 뒤에 역 안에 최루탄을 쐈다. 마치 꼭 벌레 잡으려고 연막탄 치는 것 처럼. 최루탄 천 발이 떨어진 중문대학도 입구는 막혀 있었다.

실제로 홍콩 경찰들이 시위대를 바퀴벌레, 광동어로 갓잣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시위대를 사람이 아니라 벌레로 보고 있으니 그렇게 진압을 과격하게 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홍콩 경찰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시위대를 바퀴벌레라고 부른 그 순간에 그들은 시위대에게 이미 진 것이다. 인류 역사에 걸친 사람과 바퀴벌레의 싸움에서 승자는 언제나 바퀴벌레였으니. 홍콩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고 싶으면 시위대가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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