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어떤 내용을 쓸 지 생각을 어느정도 정리한 후 쓰는 글과 무슨 내용을 쓰게 될 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쓰기 시작하는 글 두 종류가 있다. 후자는 말로만 보면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졸필이 되기 일쑤다. 용 머리로 거창하게 시작해서 뱀 꼬리로 끝나게 되는, 항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이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경우가 많고, 글이라면 모름지기 주제가 있어야 할 텐데 주제부터가 중구난방인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글은 무엇을 쓸 지 모르겠는 상태에서 그냥 써 보기로 했다. 마음이 참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뭐를 써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이 상태를 내 속에만 담아놓자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이번 글은 잘 정돈된 멋진 그림이 아니라 급류에 떠내려가는 작은 배 안에서 무작정 셔터를 눌러서 찍힌 사진에 가깝다. 운이 좋다면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던 물보라가 한 가득 찍혀 있을 지도 모른다.

모교 이름이 자사고 및 외고 폐지 논란으로 인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지도 꽤 오래 됐다. 지금대로라면 2025년에 학교를 닫게 된다고 한다. 나야 모교가 계속 남아있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지금 이 폐지 논란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이미 수많은 사람과 단체가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폐지 논란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내가 할 말에 대해 누군가가 반박할 말이 이미 인터넷에 널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무엇보다도 펜싱같이 상대방 논리의 빈틈을 날카롭게 찔러 들어가 상대의 살에 내 칼을 박아넣고 돌려 째고 후벼서 파내는 방식의 토론으로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빌어 써 보고자 하는 것은 모교 폐교에 대한 가 혹은 부가 아니라 내가 왜 모교 폐교 예정 소식으로 인해 슬퍼하는가에 대한 자기 관찰과 자기 분석, 그리고 자기 표현이다.

내 고등학교 시절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군인들은 제대하고서 군대에 다시 가는 악몽을 꾼다고들 하는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일 년에 몇 번씩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해 학교에 다시 가는 악몽을 꾼다. 우리 고등학교 동문 중 학교를 쉽게 다닌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학교 생활이 유달리 힘들었다. 설립 초창기였던 학교의 미완성된 시스템은 학생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였고, 중학생때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공부에 대한 중압감과 기숙사라는 낯선 환경에서의 생활, 그리고 이런저런 억울했던 일들은 나를 거의 미칠 지경으로 만들었다.

요즘 육아 방송을 보다 보니 아이들에게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안 주면 몸에 병이 난다고 하던데 내가 딱 그랬다. 1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 처음으로 기절을 했고 그 후 기절의 빈도는 점점 높아졌다. 입학 후 첫 기절까지 6개월, 그 다음 기절까지 3개월, 그 다음까지 1개월 반, 그 다음까지 3주, 그 다음까지 10일 하는 식으로 기절과 다음 기절 사이의 간격은 얄궂을 정도로 정확하게 공비가 0.5인 등비수열을 이루며 줄어들었고, 결국 나중에는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기절을 하다가 하루 8교시 중 4교시를 양호실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다. 코와 입에서 피를 쏟은 적도 있었다. 기숙사 학교였기 때문에 부모님은 내 상태를 잘 알지 못하셨고 설령 아셨다 한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 걸러 하루 꼴로 기절하던 어느 날 마음이 너무 터질 듯이 답답해서 학교 운동장을 미친 듯이 달렸다. 10km를 무작정 달렸고, 그 날 나는 또 기절했고, 다음날 학교는 나를 휴학시켰다. 저렴한 표현을 쓰자면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1년 꿇었다.

1년 후 복학해서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고 역시 기절을 했다. 다행히도 고2까지만 마치고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해 주는 조기졸업자 수시 전형으로 어찌어찌 대학에 붙어 학년으로는 고2로, 나이로는 동기들과 함께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수시 발표가 추석 연휴 때 났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그 때까지가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였다. 만약 학교를 고3까지 다녀야 했다면 졸업을 제대로 했을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졸업 못 한 악몽을 아직까지도 꾸는 것 같고.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보면서 학생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 학교는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졸업한 후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모교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기에 그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의 학교에 대해서는 지금의 재학생들이 할 말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 때의 모교는 생긴 지 정말 얼마 안 되어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으로 치면 아기나 어린이 단계에 있는 미숙한 상태였다.

학교만 미숙했을까. 나도 미숙했다. 기숙사에 살면서 부모로부터 인생에 대해 배울 기회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난생 처음 겪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 17살의 나는 미숙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미숙하게 상처를 입고, 미숙하게 상처를 주고, 미숙하게 도움을 받고, 미숙하게 도움을 주었다. 미숙하게 나 자신을 몰아붙였는가 하면 나를 몰아세우는 나 자신에게 미숙하게 대들기도 했다. 잘 한 일도 있었고 잘못 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결정은 온전히 내가 내렸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도 모두 다 내가 감당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그 곳에서는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았고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을 대신 내려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성인이 되어 있을 수 있었다. 별게 아니라 잘 하든 서툴든 자기 삶의 조종간을 자기가 잡고 있는 것이 성인이니까.

나는 이과였는데 모교 이과 건물 입구에는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천국, 공부를 싫어하는 학생에게는 지옥'이라는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저기서의 천국은 파라다이스(paradise)였을까 아니면 헤븐(Heaven)이었을까. 모교는 종교와는 관련이 없는 곳이었으니 아마도 파라다이스의 의미로 붙여놓았던 것 같은데, 나는 공부를 좋아했지만 학교 생활이 그렇게 힘들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파라다이스라는 말에는 쉬 동의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학교가 무엇을 의도했든 나는 헤븐으로서의 천국을 고등학생 때 살짝살짝 맛보았다. 단 맛은 쓴 맛이 있을 때 더 잘 느껴지고, 햇살은 먹구름을 뚫고 들어올 때 더 밝게 느껴지는 법이다. 인생을 아직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아니 스스로 인생을 책임질 자격이 없어서 서류에 서명도 할 수 없는 미성년(未成年)의 그 나이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웠던 삶을 겨우겨우 어찌어찌 스스로 살아가면서 그 고통이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천국도 보게 되었다.

대략 20년 전의 모교, 그 곳에는 미숙하나마 한 명의 독립적인 성인이 되어가고 있는 번데기같은 내가 있다. 기숙사 305호 왼쪽 방에서, 텅 비어 있을 때 혼자 몰래 찾아가서 꺽꺽거리며 울던 혼정실에서, 기절한 채로 병원으로 실려가던 차 뒷자리에서 나라는 애벌레는 서서히 고치를 만들었고, 그 고치 안에 들어가서 번데기가 되었고, 이윽고 그 번데기를 깨고 어른이 되어 나왔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그 학교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생각만으로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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