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만 해도 복덕방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복덕방의 업무는 부동산 매매 중개이지만 보통 복덕방이라고 하면 낡은 가죽 소파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둘러 앉으셔서 장기를 두시면서 짜장면을 시켜 드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복덕방은 그렇게 동네 사람들이 무료할 때 모여서 몇 시간씩 시덥잖은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곤 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쯤 부터인가, 공인중개사라는 말이 복덕방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 부동산 매매라는 업무의 본질은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에는 낡은 가죽 소파와 장기판 대신 회색 합성 수지로 코팅된 합판 책상과 펜티엄 컴퓨터, 육중한 CRT 모니터가 있었다. 누런 색 백열등 대신 눈이 쨍한 형광등이 있었고 짜장면 배달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복덕방(福德房)은 복(福)과 덕(德)이 있는 방(房)이라는 뜻이다. 어감 때문에 구식처럼 보여서 그렇지 사실 뜻이 참 좋은 단어이다. 반면 공인중개사라는 단어에서는 공인(公認)된 중개사(仲介士)라는 뜻 말고는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는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만 어른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 같은 틀에서 볼 때 나는 복덕방이라는 성숙한 단어가 공인중개사라는 유아기적 단어로 퇴행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의 중심이 될 궁궐을 지은 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궁궐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의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 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뜻도 좋으면서 동시에 유교를 나라의 기반으로 하겠다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이름이다. 이처럼 1395년,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 나라의 중요한 건물 이름을 붙일 때에 적어도 고전 한 수는 읆을 줄 알았고 비유와 상징을 사용할 줄 알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사는 곳의 이름은 청와대이다. 청와대(靑瓦臺)는 푸른(靑) 기와(瓦) 집(臺)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써 놓으니까 괜히 뭔가 있어보여서 그렇지, 행인이 길을 가다가 "와 저 집은 지붕이 파랗네" 라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이름이다. 깊은 뜻이나 비유나 상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엮어보려면 유물론하고나 엮일 수 있으려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어휘가 고급스러워지는데 어째 우리말은 요즘 점점 어려지는 것 같다. 복덕방과 공인중개사, 경복궁과 청와대의 차이가 그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제쯤 500년 전으로 성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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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기와 플러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가장 낯설었던 일은 수학 선생님이 +를 더하기가 아니라 플러스라고 읽었던 일이다. 선생님 뿐만 아니라 학원에서 속칭 "선행학습"을 해 온 아이들은 다들 더하기 대신 플러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빼기도 마이너스가 되어 있었다. 어색했고 이상했다. 그렇게 일 더하기 일도 아니고 원 플러스 원도 아닌 일 플러스 일이라는 이상한 언어로 수학을 배웠다. 더하기는 초등학생이나 쓰는 용어이니 중학생이 되었으면 플러스 정도는 써 주어야 한다는 이상한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곱하기와 나누기는 타임즈, 디바이디드 바이라고 안 읽었나 싶다.

안 중요한 학문이 어디 있겠냐마는 수학은 정말 중요한 학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학문일수록 어휘의 우리말화가 중요하다. 잘 만들어진, 혹은 잘 번역된 전공 용어는 개념을 쉽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다행히 고등학교 수준 까지의 수학 용어는 우리말로 대부분 잘 옮겨진 편이다. 경우의 수, 제곱, 사다리꼴, 꼭짓점, 원뿔곡선 등 좋은 우리말 용어가 많다.

의아한 점은 대학교에 가면 다시 사람들이 영어 용어를 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마치 중학교에 가자 더하기를 플러스라고 했던 것 처럼 대학에 가면 행렬을 매트릭스라고 하게 된다. 왜 그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새로운 개념을 원서를 통해서 배우다 보니 우리말 용어를 쓰고 싶어도 우리말 용어가 없다고. 그렇게 따지면 자연수, 실수, 정수도 원래는 없던 말이었다. 아니, 인류 전체에게 그런 개념 자체가 없던 적도 있었다.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서 붙여주면 될 일이다.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 나에게 와서 꽃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수학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이공계 전공 과목이 그렇다. "이콜라이에서 진 뿔려서 젤러닝 한 다음에 마말리안 쎌에 넣었습니다" 같은 말이 나온다. 대장균에서 유전자 증폭시켜서 전기영동 한 후에 포유류 세포에 넣었다고 하면 될 것을.

각 전문 분야에서 우리말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작은 변화라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예전에 중고등학생 수학 과외를 할 때면 꼭 더하기, 빼기라는 말을 썼다. 헷갈릴 일이 없는 상황이면 세모, 네모도 썼다. 단 한 번도 학부모들에게 그에 대한 불만을 들은 적이 없고 그렇게 일 년 이상 과외를 했던 학생도 있는 걸 보면 적어도 더하기 빼기 세모 네모를 썼다고 해서 학생들 수학 실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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