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때문에 10년만에 도쿄에 갔다. 그 사이에도 몇 번 일본에 간 적은 있었지만 도쿄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홍콩에 있다가 도쿄에 가니 땅이 참 넓었다. 홍콩에 살다 보면 길에서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것과 고층 건물 때문에 하늘을 못 보는 것이 일상이 되기 마련인데 도쿄에서는 길이 넓어서 걷기에 편했고, 고층 건물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하늘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땅은 넓은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왜 그럴까 고민하던 중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고, 저녁 식사 때문에 식당에 들어갔다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여백이 없어서 그랬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책 광고는 안그래도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로 가득 차 있었다. 여백도 없어서 광고판 테두리 직전까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국에서는 박찬호 선수가 인스타그램에 일기를 논문 수준으로 빼곡히 쓴다고 화제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라면 아무런 화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광고 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철 역사도 온갖 표지판과 안내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승에 대한 표지판이 있으면 또한 그 표지판의 위치를 알려주는 화살표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계단에는 모든 칸마다 우측통행이라고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여백을 채우고 채우다 도저히 그 무엇도 붙일 수 없을 만한 곳이 나타나면 뜬금없는 문구라도 붙여 놓았다. "안전제일"

그렇게 지하철에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에도 여러 가지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은 역시나였다. 의자에 앉았는데 그 순간 식탁과 의자 사이 공간에 참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가방 놓을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을 보게 되었다. '여백이 없구나'라고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땅 좁고 사람 많은 것으로는 일본이 홍콩을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넓게 산다. 식당 테이블이 4인용이면 그냥 거기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이 별 거리낌 없이 바로 앞자리에, 심지어 어떤 때는 옆자리에 와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게 될지언정 홍콩 사람들은 4인용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일본 유명 라면집에 가면 한국 독서실 스타일로 1인용 식탁을 만든 뒤 칸막이까지 쳐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모르는 사람과 겸상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문화는 개인에게 그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대신 그 사람의 공간은 그만큼 작아졌다. 칸막이가 차지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400짜리 식탁을 홍콩식으로 4명이 공유하면 누군가는 120을 쓰고 누군가는 80을 쓰겠지만 식탁 400 전체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일본식으로 칸막이를 치고 다 조각조각 나누어 놓게 되면 모든 사람이 각각 90씩을 쓰고 칸막이가 40을 차지하게 된다. 그 칸막이만큼 일본은 좁아진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히 보장해 주는 대가는 공간의 축소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니 수저통도 다 따로 놓아 주어야 하고 컵도 각각 따로 쌓아 놓아야 한다. 홍콩식이었으면 하나만 있었으면 될 수저통이 네 개가 되어야 하고, 그 만큼 개인의 공간은 더더욱 줄어든다.

또한 개인 공간 보장은 각 개인의 무한한 책임을 수반한다. 내 공간 안에서 내가 겪는 문제에 대해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알아서 다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맙습니다(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가 아니라 미안합니다(스미마셍)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를 '메이와쿠'라고 한다) 안 그래도 좁은 내 공간 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넣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여백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광고판을 보니 역시나 일본어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하지만 한국어에는 있는 띄어쓰기가 일본어에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주욱 그럴 것이다. 그 띄어쓰기의 공간만큼 한국인은 일본에서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일본인은 한국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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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하게 썼는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면서 비전공자이니까 틀려도 창피하지 않다는 뻔뻔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꽃들도" 라는 CC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花も(하나모)" 라는 일본 찬양인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구전되어 온 찬양이라고 한다. 멜로디만 들어보면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듯한 전형적인 일본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매우 일본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다음 가사이다.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花も雲も風も大海も)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奏でよ奏でよイエスを)


꽃, 구름, 바람, 넓은 바다 순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다. 꽃보다는 구름이 크고 구름보다는 바람이 더 활동 범위가 넓다. 바람과 바다는 비교하기가 애매한데 그래서인지 굳이 "넓은"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이게 왜 특이하냐 하면 일본 문화는 이어령 씨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에서 볼 수 있듯 큰 것을 작게 만드는(응축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해당 책 초반부에 언급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하이쿠를 보자.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동해에서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 게와 눈물 순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령 씨는 이를 두고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꽃들도"의 가사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 전형적인 일본 노래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가사가 다음과 같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불러보면 확실히 일본 정서가 더 잘 느껴진다.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작은 꽃들도

(海も風も雲も小花も)


그러면 왜 "꽃들도" 에서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단어들이 배치되었을까? 노래나 시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사고방식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에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감정으로 옳은 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면 시인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이다.) 이 노래는 찬양이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6)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령 비움이라는 말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작업이고 명상은 내 속을 비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묵상은 있어도 명상은 없다. 채우려면 꽃이 구름과 바람과 큰 바다가 되어야지 바다가 작은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꽃들도"의 가사 순서가 저렇게 일본적이지 않은 순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 왜 마지막이 넓은 땅이 아니라 하필이면 넓은 바다여야 했을까. 다음 구절이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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