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 없이 카톡 친구 명단을 죽죽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150년을 살것처럼 인생을 계획하고 내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는 프로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지내는 고등학생의 프로필 문구였다. 그때는 '그래 나도 학생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하고 웃으며 지나갔는데 그 후로 자꾸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잊을만 하면 다시 떠올라서 머리가 복잡했다. 보아하니 저절로 없어질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아예 작정하고 진지하게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내일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출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사는 것'의 모범답안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문장을 약간 바꿔 보았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고 하면 분석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프로필 문구에 특허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조금 바꾸면 뭐 어때.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은 내일 죽을 확률, 모레 죽을 확률, 글피에 죽을 확률 등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모든 날이 동등하게 중요해지고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지 않게 되니 하루하루를 똑같이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 되겠다. 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매일매일이 다 똑같으니 그냥 일상 속에서 살아가라' 라고 하고 끝내면 뭔가 싱겁고 허전하다. 그래서 더 파고들어 봤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 말 속에 심오한 사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의 유익을 알았다. 라틴어 경구 중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 사람들은 저렇게 경구를 만들어야만 겨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배고파 죽겠네, 웃겨 죽겠네, 졸려 죽겠네 하는 식으로 죽음을 상기해오고 있었다. 뭐뭐 해서 죽겠다는 표현을 부정적이라고 금지시킬 것이 아니다. 금지시켜야 할 것은 똑같은 말인데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 하면 괜히 멋있어 보이고 한국어로 배고파 죽겠다고 하면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그 사대주의다.

하여튼간에 삶은 죽음을 인식할 때에 농밀(濃密)해진다. 몇년 전부터 유행하는 말 중에 욜로(YOLO)라는 것이 있다. You Only Live Once, 직역하면 너는 딱 한번 산다는 말인데 뒷일 생각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질러버리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21세 청년이 트위터에 욜로라고 적어놓고 시속 190km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일이 그 한 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욜로가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뜻이어도 You Will Surely Die, '너는 언젠가 반드시 죽어'라는 문구가 있다면 욜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를 것이다. 적어놓고 나니 저런 문구가 이미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man is destined to die once)" 라는 성경 구절이다.

고등학생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에서 시작된 생각이 메멘토 모리와 욜로를 거쳐서 성경까지 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해결을 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맘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카톡을 켜 봤더니 그 학생이 그새 프로필 문구를 바꿔 놨다. 이번에는 꿈과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자야지.
"엄마, 감기 걸리면 어느 병원에 가야 돼?"
"이비인후과에 가야지"
"이비인후과는 어디가 아플 때 가는 거야?"

이비인후과는 한자로 耳鼻咽喉科라고 쓴다. 말 그대로 귀(耳, 귀 이), 코(鼻, 코 비), 목구멍(咽喉, 인후)을 다루는 과(科)이다. 중국 사람에게는 아주 직관적이어서 어린이도 알아들을만한 이름인데 (중국어에서는 한 글자를 빼서 이비후과라고 한다) 우리말에서는 한자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이름이다.

의학 용어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비인후과가 귀코목구멍과였다면 이름만 보고도 어디가 아플 때 가는 병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이비인후과를 otorhinolaryngology 라는 어려운 단어 대신에 ear, nose and throat (ENT)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못 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위의 대화가 이렇게 바뀌지 않을까?

"엄마, 감기 걸리면 어느 병원에 가야 돼?"
"감기 걸리면 콧물 나고 목이 아프지?"
"응"
"그러면 귀코목구멍과 가야지."
"아, 그렇구나!"

제목은 거창하게 썼는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면서 비전공자이니까 틀려도 창피하지 않다는 뻔뻔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꽃들도" 라는 CC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花も(하나모)" 라는 일본 찬양인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구전되어 온 찬양이라고 한다. 멜로디만 들어보면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듯한 전형적인 일본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매우 일본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다음 가사이다.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花も雲も風も大海も)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奏でよ奏でよイエスを)


꽃, 구름, 바람, 넓은 바다 순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다. 꽃보다는 구름이 크고 구름보다는 바람이 더 활동 범위가 넓다. 바람과 바다는 비교하기가 애매한데 그래서인지 굳이 "넓은"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이게 왜 특이하냐 하면 일본 문화는 이어령 씨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에서 볼 수 있듯 큰 것을 작게 만드는(응축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해당 책 초반부에 언급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하이쿠를 보자.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동해에서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 게와 눈물 순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령 씨는 이를 두고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꽃들도"의 가사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 전형적인 일본 노래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가사가 다음과 같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불러보면 확실히 일본 정서가 더 잘 느껴진다.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작은 꽃들도

(海も風も雲も小花も)


그러면 왜 "꽃들도" 에서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단어들이 배치되었을까? 노래나 시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사고방식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에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감정으로 옳은 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면 시인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이다.) 이 노래는 찬양이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6)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령 비움이라는 말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작업이고 명상은 내 속을 비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묵상은 있어도 명상은 없다. 채우려면 꽃이 구름과 바람과 큰 바다가 되어야지 바다가 작은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꽃들도"의 가사 순서가 저렇게 일본적이지 않은 순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 왜 마지막이 넓은 땅이 아니라 하필이면 넓은 바다여야 했을까. 다음 구절이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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