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2022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소살리토(Sausalito)는 사부작사부작 걷기에 참 좋은 동네였다. 바닷가 길이 길지도 짧지도 않아서 햇살을 맞으며 이리저리 걸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한산해서 걷기에 참 좋았는데, 평소라면 관광객으로 꽉꽉 차 있을 동네였겠다 싶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페리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기에 마음 놓고 실컷 걸었다.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은 아름다웠고 그 너머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는 멋졌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갈매기는 생각보다 꽤 컸고 바닷가에 있는 뚱뚱한 바다사자 동상은 귀여웠다.

이리저리 걷던 중 갑자기 태평양 바닷물에 손을 한 번 담가보고 싶어졌다. 해변이 있는 게 아니라 바위로 된 방파제 바로 옆이 바다라서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던 중 갑자기 파도가 쳐서 신발이 다 젖었다. 그래, 이런 게 다 재미이고 추억이지. 그렇게 바닷가에 있던 중 뒤를 보니 어떤 사람이 바다 풍경을 찍으려고 엄청 큰 DSLR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빨리 비켜주었다. 그쪽에서는 몸짓으로 고맙다고 인사.

그렇게 바닷가 길을 왔다갔다하며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 아까 봐 둔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뭐지? 미국에서 나를 부를 사람은 없으니 나를 부른 게 아니겠지 하며 그냥 걸었는데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비니를 쓴 백인 남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전날 전철에서 동양인 혐오 시비에 걸린 적이 있어서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길래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바닷가 풍경 찍으러 나왔거든."
"응."
"근데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서 널 찍었어."
"뭐?"
"이거 봐봐."

보니 내가 바닷물에 손 담그고 있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큰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내가 바다 찍으라고 자리를 비켜줬던 그 사람이었다. 바다가 아니라 나를 찍고 있었구만.

"전화번호 알려주면 문자로 너한테 사진 보내줄게."
"아... 그래? 근데 나 여행객이라 외국 번호인데 되려나?"

써 놓고 나니 자연스럽게 번호 따는 방법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내 번호로 사진을 보내 봤지만 문자만 오고 사진은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그 사람이 "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라며 자기 전화에서 뭔가를 누르고 마이크에 뭐라고 말을 했다. 잠시 후 내 전화로 '你的膠片' (니더 자오피앤, '너의 필름' 이라는 중국어)라는 글과 함께 아이클라우드 다운로드 링크가 왔다. 아, 조금 전에 자기 전화에다가 음성 인식으로 '니더 자오피앤' 이라고 했던 거구나. 성조 때문에 照片(자오피앤, 사진)이 膠片(자오피앤, 필름)으로 잘못 인식된 것 같긴 하지만.

"우와, 너 중국말 해?"
"조금. 쓸 줄은 몰라."
"근데 나 한국 사람이야."
"아 그래? 그러면 스타크래프트 잘 해?"
"하긴 하는데 잘 하진 못해."
"무슨 종족 하는데?"
"프로토스."
"오, 나도 프로토스야."

프로토스가 주 종족이라니 근본이 된 친구임이 확실했다. 길가에서 둘이 셀카를 찍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바다에 손을 담그고 있는 내 사진은 내가 보기에 특별히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로토스가 주 종족인 친구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믿기로 했다.

대학생 때 화학 시간에 충돌 이론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반응물들이 서로 충돌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그 중 유효한 충돌도 많아지고, 그 결과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충돌이 다 유효한 충돌은 아니다. 쓸데없는 충돌도 분명 있다. 하지만 반응이 빨리 일어나려면 어쨌든 충돌이 많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 괜히 고백을 했다가 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이 충돌 이론이 떠오른다. 만남 중에는 물론 쓸데없는 만남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재미있는 만남도 많아지고 의미 있는 만남도 많아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 문화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문화이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다는 말과 함께 바닷물에 손 담그는 내 사진을 얻기도 했고 말이지. 이것이 미국 문화의 역동성이자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해 주는 요소이다.

 

캘리포니아 202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비행기를 탈 때의 복장은 편한 게 제일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특히나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흔히들 쪼리라고 부르는 플립플랍을 신고 바지도 통이 넓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디스크로 고생한 후로는 목베개와 허리 쿠션도 챙겨서 다닌다. 환승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서 오후 5시 이륙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는 그 때가 밤 1시였다. 미국에서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차적응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자 멜라토닌을 먹고 바로 잠을 청했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어서 피곤해서 그랬는지 멜라토닌이 잘 들어서 그랬는지 비행기에서 아주 잘 잤다. 아마도 둘 다 때문이었겠지. 중간에 깨서 기내식을 먹을 때에는 일본 비행기라 간만에 일본어도 써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주스 오네가이시마스 (주스 주세요)" 정도였지만.

 

얼마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샌프란시스코 기준으로는 아침이었기에 그 때부터는 커피를 마시며 기를 쓰고 깨어 있었다. "고히 오네가이시마스 (커피 주세요)." 창밖을 보니 땅이 보였다. 미국이구나. 주거 지역 바로 옆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이 없는 산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연, 그것도 그냥 자연이 아니라 대자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연. 이번 미국 여행의 목표 중 하나는 자연이었다. 홍콩에 살면서 도시는, 사람이 만든 물질 문명은 질릴 정도로 보았다. 1 제곱 킬로미터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98명이 살고 홍콩에서는 6300명이 산다고 한다. 한국은 516명.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알려면 꽃을 좀 볼 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멋지게 가꾸어 놓은 화단의 꽃이 아니라 산, 들, 길가에 스스로 피어 있는 그런 꽃들을 말이다. 사람으로 꽉 찬 도시에서는 자연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연은 사람이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무심하고 무정하다. 자연은 사람이 왜 자취를 감추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 작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인 임진왜란을 다룬 '칼의 노래'를 이렇게 시작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비행기는 점점 낮아졌고 내 아래에 있던 구름은 정확히 내 눈높이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미국에 왜 왔냐는 입국 심사 직원의 질문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돌아가는 항공권이 있냐길래 보여줬더니 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와서 LA에서 나가냐, LA까진 어떻게 갈 거냐고 물어왔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손으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더니 그렇게 운전한다고? 하며 되묻고는 오케이, 통과.

 

시차 덕분에 나중에 돌아갈 때 뱉어내게 될 하루를 벌었다. 회전초밥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짐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금속 문 위에 붙어 있는 문구가 나를 반겨줬다. 웰컴 투 샌프란시스코. 입국 심사 직원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서 뛰기 시작했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캘리포니아 2022 - 1. 과거라는 외국

 

미국에 가려면 출발 하루 전에 코로나19 PCR 검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의 보건소 격인 홍콩의 커뮤니티 센터에 미리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직원이 다음 날 아침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아침 비행기였기 때문에 결과가 조금만이라도 늦게 나오면 미국에 못 가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중 2시간 내로 결과가 나온다던 공항 내 검사소가 생각났다. 검사를 또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돈이 아까웠지만 이럴 땐 불확실성을 없애는 게 최선이다. 바로 공항으로 가서 검사를 받고 집에 오니 정말 곧 결과가 왔다. 음성이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가족이 홍콩에 있을 때 내가 집을 이렇게 오래 떠난 적은 처음이었기에 마음이 많이 쓸쓸했다. 출국 준비 기간 내내 슬펐고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슬펐다.

어쨌든 가야 하는 일이니 가야 했다. 한 시간 걸려 도착한 홍콩 공항은 썰렁했다. 이렇게 텅 빈 홍콩 공항은 본 적이 없었다. 새삼 코로나가 항공에 끼친 영향이 실감이 났다. 면세점 매장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비싼 양주 모형에는 먼지가 가득 앉아 있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공항 내 정수기가 다 폐쇄되어 있어서 일반 가격보다 훨씬 비싼 돈을 내고 음료수를 사 마셔야 했다. 그나마도 오전 8시가 되어서야 편의점이 문을 연 바람에 한참을 갈증에 시달리며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내 비행기는 홍콩에서 도쿄의 나리타 공항을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전일본공수(ANA) 편이었다. 오전 9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약 4시간을 날아 도쿄에 도착했다. 나리타 공항 역시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텅 빈 공항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갑자기 친구 T 생각이 났다. 일본에 살고 있는 T는 지금까지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약 8년 전 처음 만났던 때부터 서로 말이 너무 잘 통해서 곧바로 친해졌던 친구다. 근무시간일 것 같았지만 카톡을 보냈다. "T야 잘 지내? 지금 미국 가고 있는데 도쿄에서 환승하게 되어서 나리타 공항에 잠시 있어. 만나지는 못하지만 일본에 왔으니 연락하고 싶어서 카톡 보냈어 ㅋ"

바로 답장이 왔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T나 나나 한국을 떠나 산 지 참 오래 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든 안 하든 사회는 우리를 교포라고 부른다. 가끔씩 가 보는 한국은 갈 때마다 참 많이 변해 있고, 우리는 점점 우리가 우리나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한국을 떠났던 때는 2011년이었다. 2011년이면 갤럭시 S2가 나왔던 때다. 나는 한국을 떠날 때 요즘 말하는 피처폰을 쓰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국은 그 때에 멈추어 있다.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 영국의 소설가 L. P. 하틀리가 썼다는 이 말에 나는 절절히 공감한다. 지금의 한국에게 있어 나는 11년 전의 한국이라는 외국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느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한국인인데, 내 나라는 한국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이 내 모국어로 말이 통하는 외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과거라는 외국에서 온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T도 그 점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홍콩에 살고 있어서, T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한국이라는 외국 출신이어서 그렇다. 사람들은 교포 2세의 정체성 혼란에는 관심을 갖지만 교포 1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교포 1세들은 정체성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깨닫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교포 1세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는 혼란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은 그 혼란이 슬픔이 되곤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