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내가 지구의 여러 언어를 관찰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단수와 복수에 대한 구분이었습니다. 지구의 언어 중에는 당신이 쓰고 있는 한국어처럼 단수와 복수를 문맥에서 파악하는 언어도 있고 영어처럼 단수와 복수를 철저히 구분하는 언어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사과가 하나 있든지 세 개 있든지 다 '사과'가 있는 것이지만 영어에서는 사과가 하나 있을 때에는 'an apple'이, 세 개 있을 때에는 'apples'가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로 인해 "오래된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드는 물소리"라는 일본의 하이쿠 한 구절을 영어로 번역할 때에 학자들이 개구리가 한 마리인지 여러 마리인지를 따지고 들었다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는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게 몇 마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그 개구리가 몇 마리인지 끝까지 따지고 들어서 'a frog'라고 할 것인지 'frogs'라고 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jumps'라고 할지 'jump'라고 할 지도 정해야 했고 말입니다. (덧붙여, 명사는 복수일 때에 s가 붙는데 동사는 단수에 쓰일 때에 s가 붙는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내 입장에서는 지구인들은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 곳 화성에서는 단수나 복수가 아니라 홀수냐 짝수냐를 따집니다. 사과가 홀수 개 있으면 '사과홀', 짝수 개 있으면 '사과짝'이라고 부르는 식입니다. 짝수는 정확히 반으로 나눌 수 있지만 홀수는 반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로는 지구에서는 언어학자가 아니라 수학자들이 홀수와 짝수를 엄밀히 구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단수, 복수를 따지는 것보다 훨씬 쓸모가 많지 않습니까? 사과 세 개와 사과 백만 개를 똑같이 'apples'라고 부르는 엉성한 분류법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단수든 복수든 다 똑같이 '사과'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지구의 언어에는 이 외에도 흥미로운 점이 정말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기회 되는 대로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화성에서,
WQ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의 살았어야 했던 고향은  (0) 2021.04.09
만국의 척척석사여 기운내라  (0) 2020.12.29
사랑하는 법  (9) 2020.07.07
똑똑한 사람과 판단이 좋은 사람  (0) 2020.07.02
인생 뭐 있나의 두 가지 의미  (0) 2020.05.21

고등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 그 달의 필독 도서였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여기서의 기술은 아트(art)이지 절대로 테크닉이 아니라고 강조하셨던 적이 있었다. The Art of Loving이라는 원제에서 영단어 art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기술로 번역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 머릿속 한 구석에는 art를 정확히 표현해주는 한국어 단어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항상 자리잡고 있게 되었다.

첫 후보 단어를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약 십 년 정도 후였다. 장자에 나오는 포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잡는 이야기가 실마리가 되었다. 짧은 이야기 중에서도 앞 부분만 간단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다. 문혜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손끝의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합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후략)"

이 이야기를 읽으며 기술이 기술 자체로 궁극의 경지에 다다르는 순간 예술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예술의 경지에 오른 기술이 art이지 않을까, 그러면 기술이 예술을 만나는 지점이니 기예(技藝)라고 번역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한동안 The Art of Loving을 나 혼자서는 '기예(技藝)로서의 사랑' 정도로 번역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갑자기 번뜩 한 생각이 들었다. Art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영어권 화자들이 동아시아의 어떤 단어를 art로 번역해갔는지를 보면 확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건 정말 제대로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흥분된 마음으로 동아시아 문학 중 영어로 번역된 제목에 art가 들어간 글을 찾기 시작했고, 의외로 매우 쉽게 그런 책을 찾았다. 손자병법, The Art of War.

손자병법은 단순히 전쟁 잘 하는 기술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사상을 전달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고양하는 책이다. 이러한 부류의 글을 한자 문화권에서는 간단하게 법(法)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손자(孫子)가 쓴 전쟁(兵)에 대한 법(法)을 영어권에서는 The Art of War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러니 에리히 프롬의 The Art of Loving은 사랑의 기술이니 기예로서의 사랑이니 할 필요 없이 간단명료하게 '사랑하는 법', 아니면 더 줄여서 '사랑법' 이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거의 20년에 걸친 고민이 드디어 끝이 났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는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다 주어진 문제와 일부만 주어진 문제, 둘 중 하나에 속한다. 필요한 정보가 다 주어진 문제란 수능 수학 문제 같은 것을 뜻한다. 쉬운 문제도 있고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어쨌든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문제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다. 학교에서의 시험은 이런 종류의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을 가려내는 데에 특화되어 있고, 그런 학생을 우리는 똑똑하다고 부른다.

필요한 정보가 일부만 주어진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이다.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할까 말까,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지원할까, 갖고 있는 주식이 최근에 10% 올랐는데 이제 그만 팔까 아니면 더 쥐고 있을까, 등등.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딸린 변수가 너무 많아서 모든 것을 사전에 다 분석하기가 불가능하고, 설령 분석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어느 날 청혼을 받았고, 고민을 하며 결혼에 대해 연구한 후 최종적으로 그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그 때는 이미 7년이 흘러서 그 여성이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자녀까지 두고 있던 때였다고 한다.

이렇게 불충분한 정보 하에서 좋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판단이 좋다고 부른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판단이 좋은 것은 아니며, 똑똑하기보다 판단이 좋기가 더 어렵고, 똑똑한 것 보다 판단이 좋은 것이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똑똑하기만 하고 판단력이 안 좋은 사람을 가리키는 헛똑똑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판단력은 정규 교육 과정에서 깊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몸에 익는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날카로운 본능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판단력을 키우는 데에 참 좋은 과목이 있다. 역사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을 내렸는지를 보면서 간접 체험과 생각을 통해 판단력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초중고의 역사 교육이 대체로 지식 전달 및 암기 위주인 것은 아쉬운 일이다. 역사 과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내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몸에 익히는 것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는(學) 것 뿐 아니라 익혀야(習) 한다.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성의 언어학자 - 단수와 복수  (0) 2020.07.18
사랑하는 법  (9) 2020.07.07
인생 뭐 있나의 두 가지 의미  (0) 2020.05.21
최소한 시신은 없었다  (0) 2020.05.17
다 괜찮은데 끼니는 거르면 안 돼  (0) 2020.05.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