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포토 플리즈. (No photo, please.)"

내 생각엔 무덤 주인은 무덤 사진 찍는 것을 정말 좋아할 것 같았는데 관리인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지난 2월에 이스라엘에 출장을 갔었다. 이스라엘까지 갔는데 예루살렘에 안 가볼 수는 없겠다 싶어 주말에 십만 원이 넘는 왕복 택시비를 써 가며 예루살렘에 다녀왔다. 예상치 못한 출장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야 스마트폰으로 정보 검색을 시작했다.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서기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지은 교회라고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님 무덤 장소가 비록 추정이라 할지언정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래서 성지 순례를 한번쯤은 가 봐야 한다. 내 경우는 성지 출장이었지만.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좀 걷다 보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 있는 곳이 있었다.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라고 했다. 인구밀도 높기로 소문난 홍콩도 그 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서 있었을지 아닌지야 누가 알겠나. 하지만 십자가는 예루살렘 그 어딘가에는 서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 전체에서 십자가가 서 있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그 곳이었을 것이라는 것 까지는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나도 거의 1시간 가량 줄을 서서 십자가가 박혀 있던 홈을 보았다.

십자가 자리를 보고 난 후에는 가뿐한 마음으로 교희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교회 건물 안에 또다시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그 건물을 빙 둘러 줄을 서 있었다. 저게 뭐지 싶어 그 곳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다. "웟 빌딩 이즈 댓? (What building is that?)"

그 사람이 얘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저스 툼. (Jesus' tomb.)" 예수님의 무덤.

난 성묘 교회가 예수님의 무덤 터에 세워진 건물인줄로만 알았지, 그 곳에 실제로 예수님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리고 그렇게 줄이 길 줄 알았으면 십자가 자리가 아니라 여기에 줄을 서는 건데. 시차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피곤해서 고민을 좀 하다가,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 무덤 안에 안 들어가보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줄을 섰다.

십자가 자리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가 정말로 예수님 무덤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제일 가능성이 높은 자리인 것은 맞을 것이다. 기독교를 로마에서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 황제가 예수님 무덤 자리를 찾으라고 시켰을 때에 신하들이 대충 아무데나 찍었다가는 반역 죄인이 되지 않았을까. 최소한도 당시, 서기 326년의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찾아낸 장소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약 300년 전, 대략 서기 26년 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직접 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는 부활을 믿었고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야 그 사람 시체가 아직도 여기 무덤에 있잖아!" 하고 말해주며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을 텐데 공교롭게도 그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모든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꼬이게 된다. 뭐야, 무덤이 비어 있잖아. 이건 분명 저 제자라는 놈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일 거야. 그런데 그 제자라는 사람들을 잡아서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그 중 몇을 죽이기까지 했는데도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난 예수를 자기들이 직접 보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자기 신념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야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지만, 자기들이 시체를 훔쳐 놓고 그 시체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며 목숨을 거는 비상식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설령 한두 명 정도는 존재할 수 있다고 쳐도 12제자 중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이 모두 그럴 수는 없었다. 목을 잘라 죽이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서 죽이고, 산 채로 솥에 넣어서 끓여도 그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자기들이 만났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무덤이 비어 있는 한 부활 반대론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그 빈 무덤이 중요하다. 부활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최소한 시신만큼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예수님의 무덤 안에 들어갔다. 빈 돌판이 있었다. 원래는 그 곳에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어 있었다.

안내원은 노 포토 플리즈를 외쳤지만, 그 무덤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내가 빈 무덤 사진을 찍는 것을 정말로 원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겸손처럼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 덕목도 없을 것이다. 겸손은 기독교에서 매우 강조되는 덕목이지만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겸손인지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한국 문화에서 말하는 겸손과 기독교의 겸손을 혼동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겸손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마태복음 16:24)" 라는 구절이 종종 맥락에 맞지 않게 잘못 인용되고, 사람들의 칭찬에 "아니에요~" 내지는 "아유 저는 실력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 겸손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태복음 11:29)" 그 예수님께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바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말한다.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 (사도행전 20:19, 새번역)" 그 바울은 같은 20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 (사도행전 20:35, 새번역)" 한국 문화에서라면 "내가 한다고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게 많았을 줄로 압니다." 같은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바울은 자기가 모든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였다고 당당히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식이 밖에 나가서 "저는 능력도 없고 부족하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며 자기 비하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자녀가 스스로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런 것은 참된 겸손이 아니라 짝퉁 겸손이요 겸손의 모조품이다.

하지만 이것을 오해해서 시험을 잘 본 후에 모든 반 친구들 앞에서 "나는 너네들보다 똑똑해" 라고 한다거나, 사업에 성공해서 큰 돈을 번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 라고 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상 맞는 말 같아 보이는데 왜 사실이 아니라는 걸까?

기독교인은 자기의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내가 이룬 그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 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잘 해서 일이 잘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에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키시며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요한복음 5:19, 새번역)" 라고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 새번역)" 라고 하셨다. 바울이 한 말을 보면 더욱 이해가 잘 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5-7, 새번역)"

각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도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더라도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씨앗을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정리하자면 첫째로, 사람의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둘째로,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생각하고 강조하는 데에서 겸손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둘째만 강조하다 보면 내가 가진 능력을 깎아내리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반대로 첫째만 강조하다 보면 내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 첫째와 둘째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건강한 겸손을 이루는 길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탄식하며 외친 말이 좋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불가강야(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더니, 정말이지 억지로 할 수가 없구나!"

제목은 거창하게 썼는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면서 비전공자이니까 틀려도 창피하지 않다는 뻔뻔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꽃들도" 라는 CC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花も(하나모)" 라는 일본 찬양인데, 멜로디만 들어보면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듯한 전형적인 일본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매우 일본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다음 가사이다.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花も雲も風も大海も)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奏でよ奏でよイエスを)

 

꽃, 구름, 바람, 넓은 바다 순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다. 꽃보다는 구름이 크고 구름보다는 바람이 더 활동 범위가 넓다. 바람과 바다는 비교하기가 애매한데 그래서인지 굳이 "넓은"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이게 왜 특이하냐 하면 일본 문화는 이어령 씨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에서 볼 수 있듯 큰 것을 작게 만드는(응축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해당 책 초반부에 언급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하이쿠를 보자.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동해에서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 게와 눈물 순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령 씨는 이를 두고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꽃들도"의 가사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 전형적인 일본 노래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가사가 다음과 같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불러보면 확실히 일본 정서가 더 잘 느껴진다.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작은 꽃들도

(海も風も雲も小花も)

 

그러면 왜 "꽃들도" 에서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단어들이 배치되었을까? 노래나 시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사고방식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에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감정으로 옳은 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면 시인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이다.) 이 노래는 찬양이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6)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령 비움이라는 말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작업이고 명상은 내 속을 비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묵상은 있어도 명상은 없다. 채우려면 꽃이 구름과 바람과 큰 바다가 되어야지 바다가 작은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꽃들도"의 가사 순서가 저렇게 일본적이지 않은 순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 왜 마지막이 넓은 땅이 아니라 하필이면 넓은 바다여야 했을까. 다음 구절이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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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유튜브에서 꽤 유명한 기독교 강사가 있다고 해서 동영상을 찾아봤다. 보면서 이 사람은 기독교를 신앙이 아니라 사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신앙인은 우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는 소리를 듣고서 동영상을 꺼 버렸다. 저렇게 교조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성경의 주요 인물들도 슬픔과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다윗이 그랬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시38:6)" 바울도 그랬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결정적으로 예수님도 그러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26:38)"


기독교를 사상으로,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면 저 유명한 유튜브 강사처럼 슬픔에 빠진 사람의 신앙을 무시하게 된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은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그 유명 기독교 강사의 동영상이 여기저기 퍼지고, 그 강사가 방송에도 초대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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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기독교 교리를 수학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시도해 봤습니다.

정의역이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집합이고 공역이 참과 거짓인 함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함수의 이름은 ‘구원’입니다. 수식을 사용해서 써 보면

함수 구원:X -> Y
X = {x | x는 사람}
Y = {참, 거짓}

이렇게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원소나열법으로 쓸 수는 없기에 집합 X를 정의할 때에는 조건제시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함수는 사람이 대입되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를 알려주는 함수입니다. 예를 들어 '구원(철수) = 참' 이라면 철수는 구원받은 것이고 '구원(철수) = 거짓' 이라면 철수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의 집합을 정의역으로 가지는 함수이기 때문에 철수 영희 갑돌이 갑순이를 다 대입해 볼 수 있지만 바둑이는 대입할 수 없습니다. 로그(log)에 음수를 넣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원(바둑이)'는 정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 하면 구원받는가?’ 입니다.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면 고등학교 집합과 명제 시간에 배운 명제함수가 필요합니다. 명제함수란 ‘p(x) 이면 q(x) 이다’ 형태의 문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p(x) 이면 구원(x) 이다

에 해당하는 p(x)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착함(x) 이면 구원(x) 이다' 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공리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주어진 이론 체계 안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면서 증명이 필요없이 참으로 인정되는 명제를 공리라고 하고, 그런 공리들을 모아놓은 것을 공리계라고 합니다. 수학에서는 증명을 할 때 어떤 공리계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한데,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의 공리계는 성경책이 되겠습니다. 공리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지금은 공리계에 있는 명제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참이라는 것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구원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찾고 싶은 구원의 조건인 p(x)에 대해 성경은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사도행전 16:31)” 라고 말합니다. 이건 성경이라는 우리의 공리계 안에서는 따질 필요 없이 참입니다. 이 구절에서 용어를 그대로 따 와서, 어떤 사람이 주 예수를 믿는지의 여부를 알려주는 ‘믿음’이라는 함수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믿음(x) 이면 구원(x) 이다

예를 들어 x에 영희를 대입하면 "믿음(영희) 이면 구원(영희) 이다", 즉 "영희는 주 예수를 믿는다. 그러므로 영희는 구원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나? 즉 위의 p(x)에 믿음(x) 대신 들어갈 수 있는 함수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그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은근 재미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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