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스크립트 언어를 배워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비주류 좋아하는 성격 탓에 당시 한창 뜨던 중인 파이썬을 안 하고 슬슬 지기 시작하던 펄을 공부했었다. C로 - 그러고보니 C++도 아니고 - 문자열 처리 코드 짜고 있던 나에게 펄은 신세계였다. 요즘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지만 배열 마지막 원소를 arr[-1] 같이 -1이라는 인덱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C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펄은 참 재미있는 언어였다. 한국어로 치자면 "거시기"에 해당되는 변수가 자동으로 존재한다. $_ 라는 변수인데, 그 덕에 코드를 듬성듬성 짤 수 있었다. 다른 언어에서는 명확하게 변수와 값을 지정해주었어야 할 상황에서 펄은 "거시기" 변수만 불러와 보면 얼추 필요한 값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변수를 생략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if문과 함께 unless 문도 있었다. Unless 문의 작동방식은 if문의 정반대. 즉 if (true)는 unless (false)와 같고... 이런 조건문을 겹쳐서 if ( unless ( if ( true ) ) ) 같은 식으로 볼썽사나운 코드를 짜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런 코딩이 가능하다 보니 남이 짠 펄 코드를 이해하는 건 정말 어렵고 어쩔때는 내가 예전에 짠 펄 코드도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그래서 펄 사용자가 많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이런 펄의 특성은 "어떤 일을 하는 데에는 하나 이상의 길이 있다 (There's more than one way to do it, TMTOWTDI)" 라는 펄의 슬로건에 잘 나타나 있다. 펄 코드에는 개발자의 개성이 원없이 묻어난다. 어쨌든 나는 펄이 참 좋았고, 펄은 내 석사 연구의 꽤 많은 부분과 함께 했다.

펄과 완전 반대편에 있는 언어가 바로 파이썬이다. 파이썬에서 import this를 치면 파이썬의 철학이 죽 나오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작업을 하기 위한 하나의, 되도록이면 단 하나의 자명한 방법이 존재한다. (There should be one-- and preferably only one --obvious way to do it.)" 그래서 파이썬은 띄어쓰기를 몇 칸으로 할 것인지까지도 한번 정하면 끝까지 지켜야 한다. 펄은? 펄 사용자들끼리 신나서 자주 하는 게 어떻게 하면 한 줄 안에 코드를 잘 구겨넣을까 하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여러모로 펄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파이썬은 영어를 닮았다. 한국어에서는 온갖 생략이 가능하다. "사랑해" 라고 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인 줄 다 안다. 영어에서는 "Love" 라고 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에 단 둘이 있어도 굳이 "I love you" 라고, I가 you를 love한다고 다 꼬치꼬치 말해줘야 한다. 우리는 사과를 먹었으면 됐는데 영어에서는 굳이 사과를 한 개 (an apple) 먹었는지 두 개 이상 (apples) 먹었는지를 말해줘야 한다.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계백 장군의 대사인 "그러니께 이번 여그 황산벌 전투에서 우리의 전략 전술적인 거시기는, 한 마디로 뭐시기 할 때꺼정 갑옷을 거시기한다, 바로 요거여. 알겄제?" 는 영어로는 말이 안 되고, 번역해 봐야 억지스럽다.

이런 다양성, 다의성은 인간의 언어에서는 언어를 풍요롭게 하고 문학의 비옥한 토양이 되는 존재이지만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프로그래밍에서는 간단함과 명료함이 미덕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파이썬 사용자는 많아지고 펄 사용자는 줄어만 간다.

예전, 대략 버전 관리 시스템으로 git이 아니라 cvs나 svn을 쓰던 때, 수많은 개발자들의 땀과 눈물이 서려있을 Visual C++ 6.0이 현역이었을 때, 간혹 3.5인치 디스켓 드라이브를 볼 수 있었을 때, 안드로이드는 나왔는데 안드로이드 스튜디오는 없어서 이클립스로 앱 만들던 때, 도스에서 터보C를 쓰던 때의 코딩은 참 자유로웠다. 참조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으니 다 개발자가 어떻게든 직접 해야 했고, 그러다보면 좀 삐그덕대더라도 분명 내 손에서 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기곤 했다. 홈페이지도 메모장에 직접 html 코드를 쳐 가면서 만들곤 했지.

요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거대해지면서 많은 부분이 규격화되었다. 이미 남이 만들어놓은 코드를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잘 가져다가 쓰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예전처럼 내가 다 하려다가는 "왜 바퀴를 재발명하고 있냐?" 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깃허브에서 여러 코드를 받아오고 스택 오버플로우에서 이것저것 찾아서 어떻게 하다 보면 금세 프로그램 하나를 뚝딱 만들 수 있다. 요즘 간단한 스마트폰 앱은 파워포인트 만들듯이 마우스로도 만들 수 있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속 한 구석이 왠지 허전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내가 만든 부분이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펄을 마지막으로 써 본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옛 생각이 나서 인터넷에서 펄을 검색해 보니 5년 안에 사용자가 사라질 언어 중 하나로 펄이 꼽혀 있었다. 바퀴를 재발명하던 때가 그립다. 스택 오버플로우 없이 프로그램을 짜던 때가 그립다. 괜히 커맨드 창에서 perl을 실행시키고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창을 닫았다. 기분이 참 $_ 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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