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2022 - 6. 맥주 마시던 어린이

십여 년 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는데 잘 해야 초등학교 3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빨대로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대낮에 아이가 맥주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마시고 있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캔에 beer라고 크게 쓰여 있는데도 주위의 어른들 중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에 두 번 놀랐었다. 신문에서 봤던 미국의 공교육 붕괴 기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척화비를 세우던 흥선대원군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니 인의예지가 없어도 너무 없네. 미국이 쇠락할 날이 멀지 않았구만.

그 아이가 마시던 것이 맥주가 아니라 루트 비어(root beer)라는 이름의 탄산음료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루트 비어는 이름과는 달리 맥주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음료수다. 맥주도 아닌데 이름에 왜 비어(beer)가 들어가는지 미국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맛은 뭐랄까, 수정과에 물파스를 섞고 탄산을 넣은 맛인데 이게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그 후로 나도 기회 될 때마다 찾아 마시곤 하게 되었다.

소살리토에서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햄버거집에서 루트 비어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주문을 했다. 예의 그 물파스 향이 코를 찔렀다. 동시에 십여 년 전의 맥주 마시던 어린이 사건도 다시금 떠올라서 조용히 혼자 씩 웃었다.

 

 

캘리포니아 2022 - 5. 뮤어 우즈, 직접 가 보아야 하는 곳

 

뮤어 우즈 국립 보호 구역(Muir Woods National Monument)은 세상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인 레드우드(Redwood)로 이루어진 숲이다. 이 숲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인 영화 혹성탈출을 통해서였다. 영화를 보며 ‘도시 바로 옆에 정말로 저렇게 큰 숲이 있다고?’ 하는 궁금증이 생겼었고, 학회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가게 되는 것이 확정된 다음부터는 뮤어 우즈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러던 중 마침 학회 일정 후로 예약해두었던 요세미티 당일 관광이 인원 미달로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요세미티는 다음에 가족과 함께 일정 길게 잡고 느긋하게 가라던 친구 K의 말이 생각나 잘 되었다 싶어 다른 요세미티 관광 상품을 알아보는 대신 뮤어 우즈에 가 보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현지 여행사 관광 상품을 예약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여행사 버스를 타러 숙소를 나섰다. 우연히도 버스 출발 위치가 숙소 바로 옆 골목이어서 참 편했다. 버스를 타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버스는 군데군데 관광 명소에 잠깐씩 멈추며 차이나타운을 거쳐 금문교를 지나 뮤어 우즈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가이드를 병행했는데 입담이 참 좋아서 모든 승객들이 다 즐거워했다. “이제부터 꼬불꼬불한 산길을 꽤 오래 가야 합니다. 바로 옆이 낭떠러지고 가드레일도 없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 운전 잘 해요. 바로 어제 운전면허 땄거든요.”

그렇게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한참 달려서 뮤어 우즈에 도착했다. “한 시간 반 자유시간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일단 버스 사진부터 찍었다. 십몇 년 전 오사카에서 도쿄로 심야버스를 타고 가던 중 휴게소에서 버스를 못 찾아 국제 미아가 될 뻔했던 이후로 생긴 습관이다.

뮤어 우즈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평생에 그런 숨은 처음 쉬어 볼 정도로 공기가 상쾌했고, 산 위라 그런지 꽤 쌀쌀했다. 입구 옆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버스에서 가이드가 뮤어 우즈의 개울은 빗물이 아니라 공기 중의 습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숲이 습하긴 했다. 하지만 뮤어 우즈의 습기는 도시의 끈적거리고 짜증나는 습기가 아니라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상쾌한 습기였다. 본격적으로 걷기 전 입구 바로 다음에 있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커피를 빼먹을 수는 없지. 추운 날씨에 얼어 있던 손이 커피 덕에 따뜻해졌다.

그 후 한 시간 반 동안은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우와, 정말 좋다” 라고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며 걷는 시간이었다. 너무 좋다, 정말 좋다라는 말만 입에서 계속 나왔다. 이 곳에 있는 레드우드들은 70미터 넘게 자란다고 했다. 대충 아파트 30층 높이. 레드우드는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굵기도 해서, 걷다가 발견한 속이 빈 레드우드 밑동 속에는 내가 열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수백 년 간 하늘로 곧게 굵게 자란 레드우드들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사이를 기분 좋게 걷고 또 걸었다. 너무나도 상쾌했다. 산림욕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 날의 기분은 나중에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낸 메시지로 남아 있다. “야, 나 피톤치드 인간이 된 기분이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전체 코스를 다 걸으면 5시간쯤 걸린다던데 맛보기만 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쉬웠다. 그 날의 일정을 다 취소하고 뮤어 우즈에 하루종일 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에 맞추어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정작 가이드가 숲을 걷다가 30분이나 늦게 와서 모두들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가이드도 뮤어 우즈가 너무 좋아서 시간도 잊고 한참을 걸었던 걸까.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드레일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다시 지나 다음 목적지인 소살리토로 향했다.

적당히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있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서 그 음식 자체에 빠져들게 되고, 적당히 멋진 경치는 보면서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절경(絶景) 앞에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비슷한 이유로 뮤어 우즈에서의 시간이 정말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뮤어 우즈를 글로 설명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뮤어 우즈는 말 그대로 ‘좋은’ 곳, 직접 가 보기 전에는 그 어떤 설명을 들어도 상상이 가지 않고 직접 가 보면 그 어떤 설명도 필요가 없는 그런 곳이다. 아쉽게도 글로도, 사진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니 이 곳에는 직접 가 보아야 한다.

 

 

캘리포니아 2022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소살리토(Sausalito)는 사부작사부작 걷기에 참 좋은 동네였다. 바닷가 길이 길지도 짧지도 않아서 햇살을 맞으며 이리저리 걸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한산해서 걷기에 참 좋았는데, 평소라면 관광객으로 꽉꽉 차 있을 동네였겠다 싶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페리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기에 마음 놓고 실컷 걸었다.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은 아름다웠고 그 너머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는 멋졌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갈매기는 생각보다 꽤 컸고 바닷가에 있는 뚱뚱한 바다사자 동상은 귀여웠다.

이리저리 걷던 중 갑자기 태평양 바닷물에 손을 한 번 담가보고 싶어졌다. 해변이 있는 게 아니라 바위로 된 방파제 바로 옆이 바다라서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던 중 갑자기 파도가 쳐서 신발이 다 젖었다. 그래, 이런 게 다 재미이고 추억이지. 그렇게 바닷가에 있던 중 뒤를 보니 어떤 사람이 바다 풍경을 찍으려고 엄청 큰 DSLR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빨리 비켜주었다. 그쪽에서는 몸짓으로 고맙다고 인사.

그렇게 바닷가 길을 왔다갔다하며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 아까 봐 둔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뭐지? 미국에서 나를 부를 사람은 없으니 나를 부른 게 아니겠지 하며 그냥 걸었는데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비니를 쓴 백인 남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전날 전철에서 동양인 혐오 시비에 걸린 적이 있어서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길래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바닷가 풍경 찍으러 나왔거든."
"응."
"근데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서 널 찍었어."
"뭐?"
"이거 봐봐."

보니 내가 바닷물에 손 담그고 있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큰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내가 바다 찍으라고 자리를 비켜줬던 그 사람이었다. 바다가 아니라 나를 찍고 있었구만.

"전화번호 알려주면 문자로 너한테 사진 보내줄게."
"아... 그래? 근데 나 여행객이라 외국 번호인데 되려나?"

써 놓고 나니 자연스럽게 번호 따는 방법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내 번호로 사진을 보내 봤지만 문자만 오고 사진은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그 사람이 "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라며 자기 전화에서 뭔가를 누르고 마이크에 뭐라고 말을 했다. 잠시 후 내 전화로 '你的膠片' (니더 자오피앤, '너의 필름' 이라는 중국어)라는 글과 함께 아이클라우드 다운로드 링크가 왔다. 아, 조금 전에 자기 전화에다가 음성 인식으로 '니더 자오피앤' 이라고 했던 거구나. 성조 때문에 照片(자오피앤, 사진)이 膠片(자오피앤, 필름)으로 잘못 인식된 것 같긴 하지만.

"우와, 너 중국말 해?"
"조금. 쓸 줄은 몰라."
"근데 나 한국 사람이야."
"아 그래? 그러면 스타크래프트 잘 해?"
"하긴 하는데 잘 하진 못해."
"무슨 종족 하는데?"
"프로토스."
"오, 나도 프로토스야."

프로토스가 주 종족이라니 근본이 된 친구임이 확실했다. 길가에서 둘이 셀카를 찍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바다에 손을 담그고 있는 내 사진은 내가 보기에 특별히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로토스가 주 종족인 친구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믿기로 했다.

대학생 때 화학 시간에 충돌 이론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반응물들이 서로 충돌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그 중 유효한 충돌도 많아지고, 그 결과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충돌이 다 유효한 충돌은 아니다. 쓸데없는 충돌도 분명 있다. 하지만 반응이 빨리 일어나려면 어쨌든 충돌이 많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 괜히 고백을 했다가 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이 충돌 이론이 떠오른다. 만남 중에는 물론 쓸데없는 만남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재미있는 만남도 많아지고 의미 있는 만남도 많아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 문화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문화이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다는 말과 함께 바닷물에 손 담그는 내 사진을 얻기도 했고 말이지. 이것이 미국 문화의 역동성이자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해 주는 요소이다.

 

캘리포니아 202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비행기를 탈 때의 복장은 편한 게 제일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특히나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흔히들 쪼리라고 부르는 플립플랍을 신고 바지도 통이 넓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디스크로 고생한 후로는 목베개와 허리 쿠션도 챙겨서 다닌다. 환승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서 오후 5시 이륙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는 그 때가 밤 1시였다. 미국에서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차적응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자 멜라토닌을 먹고 바로 잠을 청했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어서 피곤해서 그랬는지 멜라토닌이 잘 들어서 그랬는지 비행기에서 아주 잘 잤다. 아마도 둘 다 때문이었겠지. 중간에 깨서 기내식을 먹을 때에는 일본 비행기라 간만에 일본어도 써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주스 오네가이시마스 (주스 주세요)" 정도였지만.

 

얼마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샌프란시스코 기준으로는 아침이었기에 그 때부터는 커피를 마시며 기를 쓰고 깨어 있었다. "고히 오네가이시마스 (커피 주세요)." 창밖을 보니 땅이 보였다. 미국이구나. 주거 지역 바로 옆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이 없는 산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연, 그것도 그냥 자연이 아니라 대자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연. 이번 미국 여행의 목표 중 하나는 자연이었다. 홍콩에 살면서 도시는, 사람이 만든 물질 문명은 질릴 정도로 보았다. 1 제곱 킬로미터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98명이 살고 홍콩에서는 6300명이 산다고 한다. 한국은 516명.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알려면 꽃을 좀 볼 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멋지게 가꾸어 놓은 화단의 꽃이 아니라 산, 들, 길가에 스스로 피어 있는 그런 꽃들을 말이다. 사람으로 꽉 찬 도시에서는 자연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연은 사람이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무심하고 무정하다. 자연은 사람이 왜 자취를 감추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 작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인 임진왜란을 다룬 '칼의 노래'를 이렇게 시작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비행기는 점점 낮아졌고 내 아래에 있던 구름은 정확히 내 눈높이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미국에 왜 왔냐는 입국 심사 직원의 질문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돌아가는 항공권이 있냐길래 보여줬더니 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와서 LA에서 나가냐, LA까진 어떻게 갈 거냐고 물어왔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손으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더니 그렇게 운전한다고? 하며 되묻고는 오케이, 통과.

 

시차 덕분에 나중에 돌아갈 때 뱉어내게 될 하루를 벌었다. 회전초밥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짐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금속 문 위에 붙어 있는 문구가 나를 반겨줬다. 웰컴 투 샌프란시스코. 입국 심사 직원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서 뛰기 시작했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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