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2022 - 10. 세상이 굴러가게 하는 비용 5.5 달러


LA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블루보틀 매장에 들어갔다. 이게 그 유명하다는 푸른 병 카페란 말이지. 깔끔하고 한적한 매장에 들어가 5.5 달러 짜리 아이스 볼드 12온스 커피를 시켰다. 유명세 치고는 손님이 굉장히 적어서 대형 테이블을 나 혼자 쓰는 호사를 누렸다.

커피를 마시는데 매장 유리 밖으로 노숙자가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신호에 걸린 차에게 계속해서 시비를 걸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거 참 난폭하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노숙자가 갑자기 카페 쪽으로 걸어왔다. 어?

순식간에 매장 안으로 들어온 노숙자는 손님들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대신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을 괜히 건드리고 다녔고, 잠시 후 카운터로 가서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더니 커피 두 잔을 공짜로 받아서 양손에 들고 유유히 카페를 나섰다. 그러더니 지나가는 차에 커피를 뿌려대고 남은 커피는 땅에 쏟아버리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그 광경을 본 후 고개를 숙여 내 커피를 보았다. 순간 나는 돈을 내고 커피를 사 마시는데 가게에 들어와서 난리친 사람은 커피 두 잔을 공짜로 받아갔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카페 관리자 입장에서야 언제 올 지 모르는 경찰에게 신고하고, 기다리고, 그 동안 그 노숙자가 손님들에게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느니 커피 두 잔 쥐어 보내는 것이 이득이었겠지. 그런데 그러면 나 같은 얌전한 손님들은 뭔가 억울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고 한번 풋 웃어버리고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창 밖에서는 또 다른 노숙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길 건너편에 있는 멕시코 치킨집에 들어가서 소란을 피우는가 싶더니 잠시 후 치킨을 손에 들고 나오고 있었다.

반 년도 더 지난 지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때 내가 냈던 5.5 달러는 그 곳에서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커피를 마시기 위한 비용이었다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희한하게도 그 좋은 일을 하면 내가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돈을, 혹은 시간을, 혹은 정성을 써야 한다. 커피를 예로 들자면 남에게 폐를 끼치면 커피를 공짜로 받지만 얌전히 있으면 커피를 마시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것이지.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행패를 부리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계산은 치워버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덕에 굴러간다. 그렇게 나는 그 날 세상이 굴러가게 하는 비용 5.5 달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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