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2022 - 8. 인생은 운전

나는 하나를 완벽히 끝내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잘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다. 어릴 때 비디오 게임을 할 때면 화면에 나타나는 동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먹어야 했고 이야기 진행이 중요한 컴퓨터 게임을 할 때면 맵에 있는 장소를 다 방문하고 모든 등장인물을 다 만나봐야 직성이 풀렸다. 대학원생 때는 기말고사까지 다 끝난 다음에도 수업 때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내용을 들고 교수님을 찾아갔었고, 대학교 때 배웠던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가 깊이 이해가 가지 않아 사회인이 된 지금까지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 공부를 시도해 왔다.

이런 나에게 있어 볼거리가 넘쳐나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에서의 운전은 어떤 의미에서 고역이었다. 황홀한 풍경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나타났지만 나는 계속 앞만 보고 차만 몰아야 했다. 낮에는 그래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도로 옆 간이 쉼터 공간이 나타나면 차를 대고 경치를 보곤 했지만 해가 조금씩 붉은빛을 띠며 서쪽 수평선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후로는 마음이 급해져서 비어있는 도로를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삐죽삐죽한 젊은 산들이 어느새 시나브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둔탁하게 닳은 오래된 얕은 언덕과 초원이 메우고 있었다. 하얗게 쨍했던 한낮의 햇빛이 북쪽의 날카로운 절벽과 참 잘 어울렸다면 붉은 기가 도는 초저녁의 햇빛은 얕은 언덕과 초원에 잘 어울렸다. 어느새 이렇게 경치가 바뀌었지 하고 놀라던 찰나 멀리 무언가 검은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소였다. 여러 마리의 소가 넓은 풀밭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방목형 목장이구나. 소들이 주인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신기해서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목장이 도로 옆에 있었기에 소를 오랫동안 볼 수가 없었다. 운전자에게는 전방 주시의 의무가 있지 않나. 못내 아쉬워 운전하면서 고개를 잠깐씩 돌려 소들을 보려 했지만 그러자 운전도 잘 안 되고 소도 잘 안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소를 제대로 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를 보자고 도로 한복판에서 멈출 수도, 아니면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소들은 -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 내가 자세히 관찰할 정물화의 대상이 아니라 휙휙 지나가는 크로키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인생은 유턴 없는 운전과 참 비슷하다. 유턴 없는 길에서는 한번 지나온 곳에 다시 갈 수 없고, 인생에서는 한번 지나온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 운전을 하다가 창 밖에 있는 소를 제대로 보지 못 했더라도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살면서 제대로 하지 못해 후회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 그 일을 고칠 수는 없다. 갈림길 직전에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물쭈물할 시간 없이 바로 그 순간 잽싸게 길을 바꿔야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수많은 아쉬움을 남기며 앞으로 앞으로 가야 하는 것이 운전이고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지금 놓친 풍경에 아쉬워하기보다는 앞에 있는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눈앞에 펼쳐질 장관을 기대하는 것이 여행자의 바른 운전 태도이고 바른 삶의 태도이다. 덧붙이자면 그렇게 멋진 경치가 많이 나타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이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고 해는 점점 지면서 붉다 못해 주황색이 된 게으른 빛을 느릿느릿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을 받으며 나는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참 뒤 이야기이지만, 캘리포니아 여행을 다 마치고 집에 돌아간 나는 책장에 있던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 책을 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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