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지난 1월 3일에 이어령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집필 작업으로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 주시고 많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수압이 센 곳에서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 처럼 선생님의 입에서는 지식과 통찰력이 터져 나왔습니다. 메모를 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기자였다면 녹음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들은 내용을 일차로 정리해보자 5000자, 대략 원고지 25매, A4 용지 3장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를 정리하여 글로 남겨봅니다.

선생님은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기호는 물질입니다. 기호가 담겨 있는 글자도 물질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호와 문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물질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손에 도끼가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끼 자루도 바꾸고 날도 바꾸다가 결국 다 바꾸었으면 도끼란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이 물질과 비물질을 설명해 줍니다. 지금까지의 서양 문명은 물질로서의 기호에만 집중해왔으며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면서 언어론의 syntax와 semantics를 떠올렸습니다. 또한 말씀하시면서 클로드 섀논의 정보 이론까지 다루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섀논을 알고 있었지만 새삼 선생님의 지식에 놀랐던 순간이었습니다. 도끼 이야기에서는 테세우스의 배가 생각났습니다.

비물질, 즉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DNA는 물질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은 비물질입니다. 지금까지의 과학과 공학은 물질로서의 기호, bit 그 자체에만 집중해왔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이고 한계입니다.

과거에는 지혜(이 경우 통찰력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당해 보입니다)에서 지식이, 지식에서 정보가, 정보에서 데이터가 축적되었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데이터에서 정보가, 정보에서 지식이, 지식에서 지혜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각광을 받는 세계적인 AI, IT 기업들은 데이터와 정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기업들은 10년 후 매우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인문학, 예를 들자면 철학이 중요해지는 때가 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왜 사는지가 중요해지는 때가 다시 옵니다.

직업은 갈수록 줄어들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직업이 사라져가는 역사입니다. 예전에는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지금은 6-8%만 농업을 합니다. 앞으로는 일과 관심사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지금은 소수의 문인과 가수 등만 그렇게 살지만 앞으로는 모두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게 된다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AI 부흥도 전망에 상관 없이 자기가 하고 싶던 연구를 십여 년 간 붙잡고 있던 힌튼 교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의 좋은 예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불 대수(Boolean algebra)를 언급하시고 힌튼 교수의 선조가 불 대수를 만든 조지 불인 이야기를 하시더니 곧이어 존 매카시와 AI의 혹한기, 재부흥까지 말씀하셔서 전공자로서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이러면서 이야기의 주제가 자연스레 AI로 넘어갔습니다. 지금의 AI가 잘 작동하게 된 것은 애매모호함, 즉 어중간함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애매모호함'을 잘 다루는 것이 바로 한국인입니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맥주 한 두서너 병'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두세 병을 달라고 했다면 그것은 부정확입니다. 그러나 '한 두서너 병'을 달라고 한 것은 유연성, 플렉서빌리티(flexibility)입니다. 이 유연성 때문에 AI 사회에서 한국인이 강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평소에 AI와 컴퓨터공학을 연구하면서 고민하던 것에 대해 개인적인 질문을 드렸고, 그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이 있는 답을 주셨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이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라 이 글에는 적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께서 머리 속에 넘쳐나고 있는 지식과 생각을 한 글자라도 더 저에게 말씀해주시려고 하는데 제가 질문을 하는 바람에 흐름이 끊긴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S급의 주제에 대해 말씀하시는 와중에 제가 B급의 질문을 드린 기분이었습니다. 제 질문이 B+ 급만이라도 되었다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미래 산업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5개 분야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는 먹거리, 둘째는 생명, 마지막은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먹거리는 농업을 포함하는 개념이고, 생명은 의학쪽으로 발전할지 인공 생명으로 발전할지는 미지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와 넷째는 기억이 나지 않아, 대화 때 메모를 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하여 BTS를 언급하시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레 선생님의 오래된 관심사인 문화론으로 넘어갔습니다. BTS는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명법입니다. 나누고 분류하기 좋아하는 서양 문화로는 한국어로 방탄소년단이 되거나 영어로 뭔가 번역된 이름이 되거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BTS는 알파벳으로 쓰기는 했지만 방(B)탄(T)소년단(S)이라는 한국어의 약자일 뿐입니다. 서양인들은 영어면 영어고 한국어면 한국어이지 이런 식의 명명은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인이 가진 장점, 융합시키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서양 문화는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2항 대립입니다. 하지만 동양 문화는 3항 순환입니다. 가위바위보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순환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순환으로 가야 합니다. 노를 저을 때 '어기'는 힘을 빼는 동작이고 '차'는 힘을 쓰는 동작입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어기'와 '차' 사이에 '여'가 들어가서 '어기여차'가 됩니다. 비유하자면 서양 문화는 어기차, 한국 문화는 어기여차인 것입니다. 어기와 차 사이에 어기도 차도 아닌 '여'를 집어넣은 것에 한국 문화의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의 다음 일정이 있으셔서 아쉽지만 인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져간 책에 선생님의 인삿말을 받았습니다.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 덕분에 선생님의 다른 책들을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19년이라고 쓰셨다가 2020년으로 고치시는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했지만 빠진 내용이 참 많습니다. 새삼 신문에 나오는 선생님 인터뷰 내용에는 빠진 것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곧 나올 다음 책이 정말로 기대됩니다. 바쁘신 중에도 불러 주시고 만나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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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때문에 10년만에 도쿄에 갔다. 그 사이에도 몇 번 일본에 간 적은 있었지만 도쿄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홍콩에 있다가 도쿄에 가니 땅이 참 넓었다. 홍콩에 살다 보면 길에서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것과 고층 건물 때문에 하늘을 못 보는 것이 일상이 되기 마련인데 도쿄에서는 길이 넓어서 걷기에 편했고, 고층 건물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하늘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땅은 넓은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왜 그럴까 고민하던 중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고, 저녁 식사 때문에 식당에 들어갔다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여백이 없어서 그랬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책 광고는 안그래도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로 가득 차 있었다. 여백도 없어서 광고판 테두리 직전까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국에서는 박찬호 선수가 인스타그램에 일기를 논문 수준으로 빼곡히 쓴다고 화제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라면 아무런 화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광고 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철 역사도 온갖 표지판과 안내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승에 대한 표지판이 있으면 또한 그 표지판의 위치를 알려주는 화살표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계단에는 모든 칸마다 우측통행이라고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여백을 채우고 채우다 도저히 그 무엇도 붙일 수 없을 만한 곳이 나타나면 뜬금없는 문구라도 붙여 놓았다. "안전제일"

그렇게 지하철에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에도 여러 가지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은 역시나였다. 의자에 앉았는데 그 순간 식탁과 의자 사이 공간에 참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가방 놓을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을 보게 되었다. '여백이 없구나'라고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땅 좁고 사람 많은 것으로는 일본이 홍콩을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넓게 산다. 식당 테이블이 4인용이면 그냥 거기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이 별 거리낌 없이 바로 앞자리에, 심지어 어떤 때는 옆자리에 와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게 될지언정 홍콩 사람들은 4인용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일본 유명 라면집에 가면 한국 독서실 스타일로 1인용 식탁을 만든 뒤 칸막이까지 쳐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모르는 사람과 겸상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문화는 개인에게 그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대신 그 사람의 공간은 그만큼 작아졌다. 칸막이가 차지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400짜리 식탁을 홍콩식으로 4명이 공유하면 누군가는 120을 쓰고 누군가는 80을 쓰겠지만 식탁 400 전체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일본식으로 칸막이를 치고 다 조각조각 나누어 놓게 되면 모든 사람이 각각 90씩을 쓰고 칸막이가 40을 차지하게 된다. 그 칸막이만큼 일본은 좁아진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히 보장해 주는 대가는 공간의 축소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니 수저통도 다 따로 놓아 주어야 하고 컵도 각각 따로 쌓아 놓아야 한다. 홍콩식이었으면 하나만 있었으면 될 수저통이 네 개가 되어야 하고, 그 만큼 개인의 공간은 더더욱 줄어든다.

또한 개인 공간 보장은 각 개인의 무한한 책임을 수반한다. 내 공간 안에서 내가 겪는 문제에 대해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알아서 다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맙습니다(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가 아니라 미안합니다(스미마셍)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를 '메이와쿠'라고 한다) 안 그래도 좁은 내 공간 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넣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여백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광고판을 보니 역시나 일본어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하지만 한국어에는 있는 띄어쓰기가 일본어에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주욱 그럴 것이다. 그 띄어쓰기의 공간만큼 한국인은 일본에서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일본인은 한국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2000년대 초에 이공계 장학금이라는 게 생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의약계통을 제외한 이공계 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이었다. 등록금 지원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교재비까지 주는 획기적인 장학금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공계가 인기가 없어서였다. 당시 이과 수능 응시생은 문과 응시생의 절반이었다. 나라에서 보기에 이공계가 중요해 보이는데 고등학생들이 이공계 진학을 하지 않으니 돈을 주기로 한 것이었고, 다른 말로 하자면 이공계의 전망은 나라에서 돈을 줘야 할 정도로 깜깜하다는 것을 나라가 인정한 꼴이었다. 돈 받아도 안 가는 이공계가 돈을 내면서도 가는 다른 학과와 비교된 것은 덤이었다.

2010년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신문을 볼 때마다 이공계로 수험생들이 몰린다는 기사를 보게 되는 요즘에는 참 생소하게 들릴 10여년 전 이야기이다. 왜 10여 년 전에는 돈을 준대도 기피대상이던 이공계에 지금은 사람이 몰릴까. 이공계 장학금을 꾸준히 줘 왔어서? 아니다. 장담하는데 이공계 장학금 제도를 지금 갑자기 없애 버려도 이공계로 여전히 사람이 몰릴 것이다. 예전에 법대와 의대로 지원자가 몰렸던 게 장학금 때문은 아니었지 않는가. 사람들은 전망을 본다. 당장 등록금을 많이 내더라도 졸업 후에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그 학과에 지원하고, 반대로 장학금을 많이 받을 수 있더라도 졸업 후의 전망이 어두컴컴하면 그 학과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입시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저출산에 대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본 신문 기사에는 2006년 부터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69조 원을 썼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세계 최저의 출산률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공계 장학금과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첫째 낳으면 얼마, 둘째 낳으면 얼마, 셋째 낳으면 얼마, 어린이집 얼마 식으로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해준다는 소식을 보며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애 낳아서 키우는 게 나라에서 돈을 줄 정도로 기피할 만한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결한 것이 이공계 장학금이 아니라 좋아진 이공계 졸업 후의 전망이었듯, 저출산 해결은 정부 보조금이 아니라 육아가 즐거울 것이라는 전망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있다. TV에 연예인들이 나와서 예능이라는 미명 하에 결혼생활을 무슨 인생의 파멸마냥 이야기하며 히죽거리는 한, 어린이집에서 무 한 조각으로 수십명 치의 무국을 끓였다는 소식이 들리는 한, 중고등학생들이 같은 반 친구를 피범벅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는 뉴스가 들리는 한, 대졸자들이 집을 사려면 20년 동안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다 모아야 하는 한 269조가 아니라 더 큰 돈을 쏟아부어도 출산률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말이 있다. 진짜 보물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법이다. 출산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울 귀한 일인데 그 귀한 출산에 대한 문제를 돈을 퍼부어서 해결하려 했기에 역대 정책이 다 실패한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즉 어슴푸레한 새벽의 아름다움,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시원한 바람 소리, 투명하게 빨간 단풍잎, 쨍한 겨울 하늘을 국민들이 마음 놓고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을 내 자식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자녀를 갖게 될 것이다.

어젯밤에 자려는데 목이 따갑고 눈이 가려웠다. 먼지가 많은가 하고 창문을 열자 갑자기 공기청정기가 세게 돌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눈이 엄청 따가워졌다. 최루탄이었다. 전철역 한 정거장 건너에서 쏜 최루탄이 바람을 타고 우리 동네까지 온 모양이었다.

11월 12일 화요일 밤에 홍콩 중문대학에서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천 발 넘게 쐈다고 한다. 훈련소에서 받았던 화생방 훈련이 생각이 났다. 학교 캠퍼스 한 곳에 최루탄 천 발이 떨어지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건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사용하는 폭력은 최소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홍콩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시위대가 전철역으로 도망가자 역 입구를 다 막은 뒤에 역 안에 최루탄을 쐈다. 마치 꼭 벌레 잡으려고 연막탄 치는 것 처럼. 최루탄 천 발이 떨어진 중문대학도 입구는 막혀 있었다.

실제로 홍콩 경찰들이 시위대를 바퀴벌레, 광동어로 갓잣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시위대를 사람이 아니라 벌레로 보고 있으니 그렇게 진압을 과격하게 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홍콩 경찰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시위대를 바퀴벌레라고 부른 그 순간에 그들은 시위대에게 이미 진 것이다. 인류 역사에 걸친 사람과 바퀴벌레의 싸움에서 승자는 언제나 바퀴벌레였으니. 홍콩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고 싶으면 시위대가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부터 시작해야 한다.

[파이토치 (PyTorch)] IndexError: invalid index of a 0-dim tensor. Use tensor.item() to convert a 0-dim tensor to a Python number

 

0.5 이전 버전의 파이토치에서 작성된 코드를 0.5 이후 버전에서 돌리다 보면 위와 같은 에러가 날 때가 있습니다. 파이토치의 데이터 자료 구조가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코드에서 변수.data[0] 인 부분을 변수.data 로 바꾸어주시면 해결됩니다.

 

참고한 곳: https://github.com/NVIDIA/flownet2-pytorch/issues/113#issuecomment-450802359

[안드로이드] SDK Validation ANDROID_SDK_HOME is set to the root of your SDK

 

안드로이드 스튜디오에서 다음과 같은 에러가 날 때가 있습니다.

SDK Validation
ANDROID_SDK_HOME is set to the root of your SDK: C:\Users\username\AppData\Local\Android\Sdk
This is the path of the preference folder expected by the Android tools.
It should NOT be set to the same as the root of your SDK.
Please set it to a different folder or do not set it at all.
If this is not set we default to: C:\Users\username

 

이것은 ANDROID_SDK_HOME 이라는 시스템 변수가 C:\Users\사용자명\AppData\Local\Android\Sdk 로 되어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이럴 때에는 제어판의 시스템 항목에 있는 환경 변수 목록에서 ANDROID_SDK_HOME 을 찾아서 지워주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ANDROID_SDK_HOME 항목을 지워주시면 안드로이드 스튜디오가 알아서 자동으로 적당한 경로를 찾게 됩니다.

 

추석 때 짐 정리를 하던 중 17년 전에 입던 한복이 나와서 옛 생각을 떠올리며 입어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 때와 비교하면 몸무게가 10kg 넘게 늘었는데도 한 치의 어색함 없이 맞춤복처럼 잘 맞았다. 마침 그 당시에 입던 청바지도 나와서 입어봤는데 단추조차 잠기지 않아서 제대로 입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맞추었던 양복이 체중이 고작 몇 kg 늘자 안 맞게 되어서 수선했던 일도 생각난다.

세계 어느 나라든 박물관에 가면 그 나라의 전통 의복을 볼 수 있다. 옷이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복과 양복을 비교하면 한국과 서양 문화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복은 옷이 사람에 맞춘다. 허리는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통이 크게 되어 있어서 남는 길이를 몸에 둘러 감게 되어 있다. 그래서 17년 전의 내가 입으나 몸무게가 10kg에 추가로 추석 음식만큼 늘어난 지금의 내가 입으나 그저 겹쳐서 몸에 두르는 길이만 짧아질 뿐 한복 바지는 딱 맞게 되어 있다. 허리띠도 필요한 대로 길이를 조절해서 묶으면 된다. 두루마기의 옷고름도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게 한복의 멋이다.

양복은 사람이 옷에 맞춘다.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복이라고 해도 양복은 한 번 만들어지면 그 옷에 사람이 맞춰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양복의 핏(fit)은 한 치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디올 옴므를 입으려고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는 에피소드가 양복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양복은 벨트를 조이고 넥타이를 꽉 매야 하는 옷이다. 그래서 양복을 잘 입으면 멋이 아니라 무슨 브랜드 이름마따나 스타일이 난다. 스타일과 석판에 무언가를 긁어서 새긴다는 뜻의 스타일러스(stylus)는 어원이 같다. 이어령 선생님이 언급한 대로 나를 긁고 깎아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 한번 새겨지면 변형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스타일이다.

그래서 한복과 양복이 다르고 멋과 스타일이 다르다. 멋이 아니라 스타일을 따르게 되면서 사람들이 옷 입는 것이 많이 비슷비슷해졌다. 개성을 따른다고 하지만 이미 사회에서 개성이라고 용인되어 있는 정형(定形)을 따를 뿐인 경우가 많다. 대충 입는 것 같아도 정해진 방식대로 대충 입어야 하는 것이 현대 한국 패션이고 한국 패션의 비극이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덕수궁(德壽宮)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整然)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均衡)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피천득 선생님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라고 했던 혼자서 옆으로 꼬부라진 꽃잎 하나를 나는 한국인의 정서 속에 존재하는 멋이라고 본다. 정해진 규칙, 즉 정해진 스타일에 답답함을 느끼고 누가 뭐래도 내가 해보고 싶은 대로 청자 연적의 꽃잎 하나처럼 옆으로 꼬부라져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 한국인의 멋을 억누르지 말고 살려줘야 한다. 그것을 '멋대로 한다'며 부정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멋지다'고 인정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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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 관련해서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는 문구 중에 특별히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다. "우리 집이 얼마나 좁은데! 내가 감옥 가는 걸 무서워할 것 같아?"

부동산은 홍콩의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문제다. 유학 온 대학생들이 인턴할 때 사는 5평짜리 원룸 월세가 135만원인데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서울대, 카이스트 위치에 있는 홍콩대와 홍콩과기대의 졸업생 초봉 중앙값(median)이 각각 300만원, 270만원이다.[1][2][3] 홍콩의 대학 진학률이 15% 정도에 불과하고 홍콩대와 홍콩과기대가 흔히 말하는 입시 커트라인 상위권 대학임을 감안하면 홍콩에서 20대 직장인이 자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렵게 따질 것 없이, 홍콩의 최저 임금이 시급 기준 5625원이다.[4] 하루 8시간씩 30일을 꼬박 일하면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게 5평짜리 원룸 월세 135만원이 딱 나온다. 이러니 홍콩 젊은이들은 결혼을 못 하고, 결혼을 해도 부부가 각자의 부모님 집에 따로 산다.

지금의 홍콩 시위를 이해하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 젊은이들이 "우리 좀 살게 해줘"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외지인에게 부동산 시장이 열리는 바람에 부동산 구매자와 실수요자가 달라져서 부동산 값이 폭등했으니 이것 좀 해결해달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관광도시이고 아시아 금융의 허브이면 일수록 홍콩인들의 삶은 팍팍해져 가니 어떻게 좀 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꾹꾹 눌려 쌓여 있던 불만을 뻥 터뜨린 결정적인 사건이 범죄인 송환법이었던 것이고.

어떻게 되는 것이 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시위가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홍콩에 살면서 느낀 점은 적어도 주거용 부동산에 대해서만큼은 실수요자 위주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올해에 신규 분양하는 홍콩의 한 아파트는 한 채의 넓이가 3.6평(36평이 아니라 3.6평), 가격은 2억 6천만원이다.[5] 누가 뭐래도 이건 아니다.

- 주석

[1] 글에서 사용한 환율은 1 홍콩 달러당 150원.
[2] 20,042 홍콩 달러. 홍콩대에서 발간한 Graduate Employment Survey 2018을 참조.
[3] 18,100 홍콩 달러. 홍콩과기대에서 발간한 Graduate Employment Survey 2018을 참조.
[4] 37.5 홍콩 달러. 홍콩 노공처(노동부) 자료 참조.
[5] Tuen Mun 지역에 있는 T-Plus라는 128 스퀘어 피트(3.6평)짜리 아파트 가격이 최소 173만 홍콩 달러(2억 5950만원). South China Morning Post의 Developer slashes prices of T-Plus flats by 38 per cent to get first-home buyers to give Hong Kong’s smallest abodes a look-in 기사 참조.

10년도 더 전, 학원 강사를 할 때의 일이다. 중학생 수학 수업에서 2차 함수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학생들에게 2차 함수 그래프를 직접 그려보게 하고 싶어졌었다. 문제 풀려고 대충 그리는 것 말고 진짜로 모눈종이에 칸을 다 맞춰서. 그래서 수업시간에 모눈종이를 가지고 들어갔고 아이들은 낑낑대면서 그래프를 그렸다. 그 전까지 대충 오목한 컵 모양으로 그려놓고 x절편과 y절편 좌표만 표시할 때와 달리 모눈종이에 그래프를 직접 그리자 제곱값이 얼마나 가파르게 상승하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y는 x제곱이라는 단순한 함수만 하더라도 x가 4, 5쯤만 되면 모눈종이를 벗어났다. 그 날 그 수업 자체만 놓고 보면 문제도 하나도 안 풀고 진도도 거의 못 나갔지만 그 수업 이후로 학생들이 2차 함수를 친숙하게 느끼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수학에도 실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도형과 작도 문제를 풀 때 평행하지도 않은 선을 그려놓고 평행하다고 믿으면서, 대충 짜부라진 감자같은 것을 그려놓고 원이라고 여기면서 풀었다. 선생님들은 가끔 분필을 끼워 사용하는 커다란 칠판용 컴퍼스를 자와 함께 쓰셨지만 학생들이 자와 컴퍼스를 쓰는 일은 없었다. 이 때 만약 자와 컴퍼스로 이런저런 것을 작도하는 실습이 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수학에도 실습거리는 많다. 운동장에 지름이 100 발자국 짜리인 원을 그린 후에 둘레를 따라 걸어보면서 진짜로 둘레가 314 걸음이 나오는지를 세어 봐도 좋을 것이고, 공을 가득 덮도록 색종이를 모자이크처럼 붙였다가 뗀 후에 색종이의 넓이를 구해서 공의 겉넓이가 진짜 4 곱하기 원주율 곱하기 반지름의 제곱인지를 확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설날이나 추석 때 친척들 키를 다 재서 정규분포를 가정한 뒤 평균과 표준편차 값을 구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실습을 통해서 학생들의 수학에 대한 관심도와 이해도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에 대해 공부하는 것과 피아노를 쳐 보는 것이 다르고, 요리 방송을 보는 것과 직접 요리를 해 보는 것이 다르고,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과 직접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갔다 와 보는 것은 다르니까. 나중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그런 교육을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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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남부에 있는 운남(雲南) 성은 인도,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등과 같은 위도에 있지만 고도가 높아서 여름에도 서늘한 곳이다. 운남성 여강(麗江) 시의 경우 평지가 이미 해발 2500m 정도 되어 백두산 높이와 비슷하고, 이곳에 있는 높이 5598m 짜리 옥룡설산은 만년설이 있을 정도다. 삼국지를 즐겨 읽은 사람에게는 맹획의 고장으로 유명할 것이다.

2016년 12월에 이 곳에 여행을 갔었다. 도착하자 마자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공기에 감탄했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먼지만 없는 게 아니라 공기도 없어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 내내 약한 고산병 증세로 추정되는 소화불량과 두통을 달고 살았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우리가 중국 하면 흔히 생각하는 한족이 아닌 여러 소수 민족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곳이라 볼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았다. 만약 신라가 676년에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자리에는 중국의 어느 성이 신라성 정도의 이름으로 들어서 있었을 것이고 한민족은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 되었을 것이며 인터넷에는 “이민족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중국 신라성 5박 6일 여행 특가상품” 같은 게 팔리고 있었겠지.

하여튼 생각할 것이 참 많던 운남성 여행에서도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옥룡설산이었다. 말이 여강이지 숙소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직 달이 떠 있던 새벽부터 일어나서 승합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가이드로부터 두툼한 노란색 방한복과 함께 헤어스프레이 통처럼 생긴 산소통을 받고 옥룡설산 발치까지 가서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가 출발하던 곳의 높이가 이미 해발 3356m였고, 케이블카에서 내린 곳은 4506m, 대충 한라산 두 개 반 정도의 높이였다. 보통 지평선을 보려면 평야에 가야 하는데 그 정도 높이까지 가자 산으로 가득찬 지평선을 볼 수 있었다.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난간 저쪽으로는 사람의 발자국이라고는 전혀 찍혀있지 않은 눈인지 얼음인지 모를 것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눈은 몇천 년을 그 자리에 그렇게 쌓여 있었을 것이다. 가끔씩 날아와서 쉬다 간 매라면 모를까 그 자리에서 시야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끝없이 펼쳐진 산을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설령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한 모험가가 옛날에 그곳까지 올라갔었다 하더라도 내가 케이블카에서 보았던 광경은 못 보았을 것이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곳의 산과 눈과 하늘은 2016년 12월에 나에게 그 경치를 보여주기 위해 적어도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묵묵히 기다려왔던 셈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많은 임금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지만 보지 못했다.” 운남성 여행을 곱씹을 때 마다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운남성의 왕이었던 맹획도, 맹획을 잡으러 왔던 제갈량도, 중국의 그 어떤 황제도 내가 보았던 광경은 보지 못했다. 북경에 인공으로 이화원을 지을 정도로 경승지를 좋아하던 황제들이었으니 기회만 되었다면 옥룡설산의 비경을 보러 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중국을 쥐고 흔들던 황제들도 보지 못했던 경관을 입장료와 케이블카 비 몇만 원만 내고 본 내 눈은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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