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처럼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 덕목도 없을 것이다. 겸손은 기독교에서 매우 강조되는 덕목이지만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겸손인지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한국 문화에서 말하는 겸손과 기독교의 겸손을 혼동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겸손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마태복음 16:24)" 라는 구절이 종종 맥락에 맞지 않게 잘못 인용되고, 사람들의 칭찬에 "아니에요~" 내지는 "아유 저는 실력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 겸손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태복음 11:29)" 그 예수님께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바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말한다.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 (사도행전 20:19, 새번역)" 그 바울은 같은 20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 (사도행전 20:35, 새번역)" 한국 문화에서라면 "내가 한다고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게 많았을 줄로 압니다." 같은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바울은 자기가 모든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였다고 당당히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식이 밖에 나가서 "저는 능력도 없고 부족하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며 자기 비하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자녀가 스스로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런 것은 참된 겸손이 아니라 짝퉁 겸손이요 겸손의 모조품이다.

하지만 이것을 오해해서 시험을 잘 본 후에 모든 반 친구들 앞에서 "나는 너네들보다 똑똑해" 라고 한다거나, 사업에 성공해서 큰 돈을 번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 라고 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상 맞는 말 같아 보이는데 왜 사실이 아니라는 걸까?

기독교인은 자기의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내가 이룬 그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 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잘 해서 일이 잘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에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키시며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요한복음 5:19, 새번역)" 라고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 새번역)" 라고 하셨다. 바울이 한 말을 보면 더욱 이해가 잘 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5-7, 새번역)"

각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도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더라도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씨앗을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정리하자면 첫째로, 사람의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둘째로,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생각하고 강조하는 데에서 겸손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둘째만 강조하다 보면 내가 가진 능력을 깎아내리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반대로 첫째만 강조하다 보면 내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 첫째와 둘째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건강한 겸손을 이루는 길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탄식하며 외친 말이 좋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불가강야(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더니, 정말이지 억지로 할 수가 없구나!"
중학생 시절 국어 시간에 잘못된 언어 습관의 예로 초가집, 역전 앞 등의 표현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초가(草家)의 가(家)가 집 가 자이니 초가집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 논리는 이해는 갔지만 무언가 개운치가 않았다. 무의식중에 풀리지 않은 찝찝함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 후로 가끔씩 같은 말이 여러 번 반복된 단어들을 발견하면 생각에 빠지곤 했다. 손수건의 수(手)는 손 수 자이니 그러면 손수건과 수건이 같은 건가? 그런데 건(巾)이 수건 건 자이니 그러면 수건과 건도 같고, 결국 손수건은 건인가? 영지(靈芝)버섯의 지(芝)는 버섯 지인데 그러면 영지버섯은 영버섯버섯인가? 국어학자들은 초가집이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는 것 처럼 손수건도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려나?

초가집이 틀린 표현이라고 했던 국어학자들은 단어의 의미만 보고 가(家)와 집을 똑같다고 했다. 가(家)는 중국어에서 온 것이고 집은 순우리말이라는 차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뜻이 같더라도 새마을과 신촌과 뉴타운은 쓰임새가 다른 것인데 국어학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 혹은 심리학자였다면 초가집과 초가가 같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가 뒤에 쓸데없이 중복되이 맹장처럼 붙어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집이라는 글자는 한국인들이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고유 문화를 어떻게 해서든 남겨놓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 년 넘게 중국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한국인들은 초가에는 집을 붙이고 역전에는 앞을 붙이고 수건에는 손을 붙이면서 끈덕지게 자기 문화를 남겨 왔다. 일제시대에는 모찌를 꿋꿋이 모찌떡이라고 불렀고 영어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에도 갱(gang)을 깡(gang)패, 캔(can)을 깡(can)통이라고 부르면서 순우리말을 어떻게 해서든 남겨 왔다.

2010년대 들어서 한국인 대학원생들이 랩을 랩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없던 말이다. 랩은 연구실이니 랩실이라고 하면 연구실실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한국 문화의 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한국인의 습관을 본다. 여기서 실(室)은 한자이긴 하지만 중국어가 아니라 한자 한국어로 쓰인 것이다. 세계 학문의 사실상 표준 언어가 영어가 되어 버려서 논문도 영어로 쓰고 다른 나라 연구자들과 교류도 영어로 해야 하는 시대이지만 한국의 대학원생들은 꿋꿋이 랩 뒤에 굳이 실을 붙여서 랩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이 있는 한 한국인과 한국 문화는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끈질기게 살아 남을 것이다.

[VI, VIM] 윈도용 gVim에서 Ctrl+C등 윈도 단축키 사용하기

 

_vimrc 파일에 다음 줄을 넣어주면 됩니다.

 

source $VIMRUNTIME/mswin.vim

 

전산을 업으로 삼다 보니 습관적으로 최적화를 생각하게 된다. 코드를 이렇게 바꾸면 속도가 몇 퍼센트 빨라질까에서부터 시작해 몇 시 몇 분에 집에서 나가서 몇 번 버스를 몇 분 동안 기다리다가 그래도 버스가 안 오면 전철을 타고 가는 것이 소요 시간의 기대값을 가장 짧게 만들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최적화라는 주제는 항상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어쩌면 벽(癖)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종종 동시에 세탁기를 돌려 놓곤 했다. 세탁기는 무조건 한 시간동안 돌아야 하니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탁기를 돌려 놓으면 설거지가 끝날 때 즈음에 세탁도 얼추 끝날 거고, 그러면 시간 낭비 없이 바로 빨래를 널 수 있지 않는가. 이걸 전산 용어로는 파이프라이닝(pipelining)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시간의 양은 최적화해주지만 시간의 질은 최적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다.

설거지를 마쳐갈 때 즈음이면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면서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도 한 번 꺼내서 뒤적거려 보게 되고, 아니면 노래라도 한 곡 듣게 될 것이다. 아니면 한 10분 정도 잠깐 누워서 눈을 감고 조용히 있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때맞춰 창 밖에서 짹짹거리는 새 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빨래도 딱 맞춰서 끝나 있으니 커피도 못 마시고, 책도 못 펼쳐 보고, 노래도 못 듣고, 잠깐 누워있거나 새 소리를 듣는 것은 더더욱 못한 채 바로 빨래를 널어야 한다. 그렇게 빨래를 다 널고 제습기까지 틀고 나면 마치 내일의 죠의 마지막 장면처럼 털썩 주저앉아서 "하얗게 불태웠어..."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시간이 많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 시간은 내가 힘이 다 빠진 채 널부러져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시간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최적화하면 필연적으로 CPU 사용량은 올라가게 되어 있다. 쉽게 말해 스마트폰이 뜨끈뜨끈해지고 배터리가 빨리 닳게, '광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레닌은 양이 곧 질이라고 했다지만 그 말은 적어도 설거지와 빨래 후의 쉬는 시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다 된 빨래가 세탁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무시한 채 이렇게 조금이라도 쉬려고 앉아 있으니 새 글 하나를 쓸 수 있지 않았나. 자, 이제는 설거지 할 때는 설거지만, 빨래 할 때는 빨래만 하자. 그 사이의 비는 시간은 최적화해서 없애버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기지개라도 키고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마셔야 하는 생명의 시간이다.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

닭과 시계는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닭과 시계가 없어도 새벽은 온다. 단지 사람들이 새벽이 왔다는 것을 잘 모를 뿐.

그에 반해 애기는 새벽을 '만든다'. 아직 한밤중이더라도 애기가 젖 달라고 울고 보채면 그 때부터 새벽이 시작된다. 애기가 울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같은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은 새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비싼 시계라도 새벽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가장 작은 애기라도 새벽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의 힘이다. "애기의 새벽"은 사람의 그러한 능력에 대한 시이다.

[안드로이드] 일정 시간동안 멈춘 후 작업하기 (postDelayed 사용)


안드로이드 개발을 하다 보면 몇 초 동안 기다린 후에 작업을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자바 프로그래밍에서라면 Thread.sleep(3000); 등을 사용하면 되겠지만 안드로이드에서는 앱이 그 시간동안 먹통이 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코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안드로이드에서는 다음과 같은 코드를 사용하면 됩니다.


new Handler().postDelayed(new Runnable() {

        @Override

        public void run() {

          someFunction(); // 일정 시간 기다린 후에 실행될 코드를 이곳에 씁니다.

        }

    }, 3000); // ms 단위라서 1000이 1초입니다.


( 참조한 사이트: https://stackoverflow.com/a/31041945/1125721 )

많은 분들께 유용할 것 같아서 홍콩과기대 가는 길을 사진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하철 노선도를 제외한 사진은 모두 직접 찍었습니다.)

0. 항하우 (Hang Hau) 지하철역에서 내립니다.

1. B1 출구로 나가자마자 좌회전합니다.

2. 어두컴컴하고 노란 조명이 있는 곳이 버스 정거장입니다. 직진해서 들어갑니다.

3. 사진의 화살표 방향으로 계속 갑니다.

4. 버스 정거장 안에서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5. 과기대학(科技大學)이라고 쓰여 있는 11M번 미니버스를 타고 산길을 지나 종점까지 가면 됩니다. 사람들이 모두 우루루 내리는 곳이 종점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자바] JNI에서 jboolean을 bool로 바꾸기


자바에서 JNI를 사용하다 보면 인자로 받은 jboolean을 bool형으로 바꾸어야 할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에는 아래 코드와 같이 하면 됩니다.

JNI_FALSE와 다른지를 검사하는 것이 JNI_TRUE와 같은지를 검사하는 것보다 좀 더 안전합니다.


jboolean foo;

bool bar;


// foo가 JNI_FALSE와 다른지를 검사하기 때문에 foo와 bar이 같은 논리값을 갖게 됩니다.

bar = (bool) (foo != JNI_FALSE);


( 참조한 곳: https://stackoverflow.com/a/10192690/1125721 )

한번 상상해보자. 콜라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전용 잔을 산다. 콜라 재료의 원산지에 따라 콜라 가격에 차등을 둔다. 여럿이서 콜라를 마실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에게 콜라를 따라 줄 때에는 두 손으로 따라야 하며 잔이 비지 않은 상태에서 콜라를 더 따라주면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숙성 년도에 따라 저급 콜라와 고급 콜라가 구분되고 고급으로 갈 수록 가격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고급 콜라를 마시는 것이 상류 사회의 척도인 양 취급되며 나중에는 콜라를 마시는 것이 정신 수양의 척도로까지 인식되어 콜라도(道)라는 것이 생겨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콜라를 술이나 차로 바꾸면 그 순간 모두 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술과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문화 요소라는 뜻이다. 시선(詩仙), 시를 쓰는 신선이라고까지 불렸던 이태백은 對酒還自傾(대주환자경, "술을 대하니 다시 또 술을 기울이네" 라는 뜻)이라는 시구를 썼고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잠에서 깨려고 잘라버린 눈꺼풀은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술과 차는 이렇게 종교에까지 연결되는 음료인 것이다. 이태백이 시선(詩仙)이라고 불렸던 것과 달마 전설에서 알 수 있듯 도교의 음료는 술이고 불교의 음료는 차다.

술과 차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술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지만 차는 정신을 맑게 한다. 술은 사람을 졸리게 하지만 차는 잠이 확 깨게 한다. 술을 마신 사람은 감정적이 되지만 차를 마신 사람은 이성적이 된다. 그래서 술은 밤의 음료이고 차는 아침의 음료이다. 술과 차라는 이 두 음료가 지금까지 좁게는 한국의, 넓게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두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대표해 왔다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한국에 술도 차도 아닌 새로운 음료가 들어왔다. 잠이 확 깨게 하는 것은 차를 닮았는데 많이 마시면 감정적으로 흥분되게 하는 것은 술을 닮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차의 특성이 있는가 하면 중독되게 만드는 술의 특성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색깔은 차처럼 은은하지도 술처럼 투명하지도 않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이다. 바로 커피다.

커피는 맨 위에서 언급했던 술과 차의 모든 특성을 갖고 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한 전용 잔이 있고 커피 원두의 원산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세련된 문화로 취급되며 다도(茶道)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커피를 만드는 도구들은 단순히 도구를 넘어서 예술의 언저리를 건드리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술이 도교와, 차가 불교와 연결되듯 커피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연결된다. 커피는 한동안 이슬람 문화권의 음료였다. 이슬람권에서는 종교 행사 중에 잘 깨어있기 위한 용도로 커피를 애용했고, 이슬람과 사이가 안 좋았던 유럽에서는 당연히 커피를 싫어해서 악마의 음료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야사에 따르면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커피를 축복한 이후로 기독교권에서도 커피를 널리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임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니 유럽과 한국의 커피 역사는 약 300년 정도 차이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문화의 한 요소이며 종교로까지 이어지는 음료인 커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술과 차가 근대까지의 한국의 두 생활양식을 대표한다는 가설이 맞다면 현대 한국에는 술도 차도 아닌 커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존재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한국의 커피스러운 생활양식이란 뭘까. 머릿속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많은 대답 중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탈진'을 꼽겠다.

커피는 탈진한 사람들이 내일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쓸 때 사용하는 음료다. 대학생들은 시험기간에 밤을 새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똑같이 카페인이 들어있다고 해도 밤을 새기 위해 한밤중에 차를 마시는 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나와서 본인들 표현대로 하자면 '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몇백 밀리리터씩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신다. 그러다가 카페인에 내성이 생겨버린 사람들은 커피를 넘어서서 박카스나 레드불 같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기 시작한다.

오해를 풀기 위해 밝혀두자면 한국에는 커피를 음미하며 즐기는 애호가들이 물론 매우 많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음료를 마시는 전체 인구 중 탈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용도로 그 음료를 마시는 사람의 비율이 술이나 차보다 커피의 경우에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위에 적었듯이 낮의 음료는 차였고 밤의 음료는 술이었다. 낮술이라는 단어가 따로 만들어졌어야 했을 정도로 술은 밤에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는 낮에나 밤에나 다 마실 수 있지만 밤에 차를 마실 때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잘 자기 위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낮에는 잘 깨어 있고 밤에는 잔다는 극히 상식적인 생활 양식이 술과 차에 모두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커피는 그것을 깨 버렸다. 밤에는 자야 하는데 억지로 깨어있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그러니 늦게 자게 되어 다음날에 피곤해지고, 피곤하니 점심 때에 졸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신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모든 것이 경쟁적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모습이다. 지금의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신다. 현대 사회가 한국에서 커피의 양적 팽창은 이루어냈지만 사람들이 커피를 진정 즐기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 1927-1989)라는 미국의 유명 작가가 1982년에 쓴 Down the River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네 문화는 커피와 휘발유 위에서 돌아간다. 첫째 것의 맛이 둘째 것과 같을 때가 종종 있다. (Our culture runs on coffee and gasoline, the first often tasting like the second.)" 이 말은 현대 한국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의 커피는 지금도 종종 휘발유 맛인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카톡 친구 명단을 죽죽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150년을 살것처럼 인생을 계획하고 내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는 프로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지내는 고등학생의 프로필 문구였다. 그때는 '그래 나도 학생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하고 웃으며 지나갔는데 그 후로 자꾸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잊을만 하면 다시 떠올라서 머리가 복잡했다. 보아하니 저절로 없어질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아예 작정하고 진지하게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내일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출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사는 것'의 모범답안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문장을 약간 바꿔 보았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고 하면 분석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프로필 문구에 특허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조금 바꾸면 뭐 어때.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은 내일 죽을 확률, 모레 죽을 확률, 글피에 죽을 확률 등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모든 날이 동등하게 중요해지고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지 않게 되니 하루하루를 똑같이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 되겠다. 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매일매일이 다 똑같으니 그냥 일상 속에서 살아가라' 라고 하고 끝내면 뭔가 싱겁고 허전하다. 그래서 더 파고들어 봤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 말 속에 심오한 사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의 유익을 알았다. 라틴어 경구 중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 사람들은 저렇게 경구를 만들어야만 겨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배고파 죽겠네, 웃겨 죽겠네, 졸려 죽겠네 하는 식으로 죽음을 상기해오고 있었다. 뭐뭐 해서 죽겠다는 표현을 부정적이라고 금지시킬 것이 아니다. 금지시켜야 할 것은 똑같은 말인데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 하면 괜히 멋있어 보이고 한국어로 배고파 죽겠다고 하면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그 사대주의다.

하여튼간에 삶은 죽음을 인식할 때에 농밀(濃密)해진다. 몇년 전부터 유행하는 말 중에 욜로(YOLO)라는 것이 있다. You Only Live Once, 직역하면 너는 딱 한번 산다는 말인데 뒷일 생각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질러버리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21세 청년이 트위터에 욜로라고 적어놓고 시속 190km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일이 그 한 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욜로가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뜻이어도 You Will Surely Die, '너는 언젠가 반드시 죽어'라는 문구가 있다면 욜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를 것이다. 적어놓고 나니 저런 문구가 이미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man is destined to die once)" 라는 성경 구절이다.

고등학생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에서 시작된 생각이 메멘토 모리와 욜로를 거쳐서 성경까지 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해결을 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맘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카톡을 켜 봤더니 그 학생이 그새 프로필 문구를 바꿔 놨다. 이번에는 꿈과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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