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절이다. 홍콩에서는 이 날이 꽤 중요한 휴일이다. 청명절이 되면 홍콩 사람들은 아침부터 조상들의 묘를 찾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성묘를 가는 셈인데, 흙을 둔덕처럼 쌓아 놓고 풀이 자라게 하는 우리 무덤과는 달리 홍콩 무덤은 돌로 되어 있어서 벌초를 할 일은 따로 없다.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보통 향을 피우고 내려온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공동묘지 입구이기 때문에 청명절은 일년 중 우리 집 근처에 사람이 제일 많은 날이다. 휴일이라 오랜만에 늦잠을 잔 뒤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공동묘지로 가고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경찰들까지 와서 일종의 사람 교통정리를 해 주고 있었다.

밀렸던 집 청소를 하고 늦은 오후에 집에서 슬슬 나왔다. 청명절은 24절기에서 춘분 다음이라 대충 겨울이 다 지나가고 봄 기운이 완연해질 즈음이 되어 집 청소하기에 좋은 날이다. 설렁설렁 전철역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평소에 자주 가는 카페에 왔다. 간만에 읽을 책도 한 권 가지고.

그런데 카페가 꽉 차 있었다. 인구밀도가 높은 홍콩에서 카페에 자리가 없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했다. 보통은 모르는 사람과 테이블을 같이 쓸 정도로는 자리가 있는데 오늘은 정말 카페가 빽빽했다. 나보다 먼저 커피를 산 사람들이 자리가 비기만 하면 가서 앉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하다가 그냥 커피를 사 들고 바깥 공원 벤치로 나왔다. 더 밝고 더 쾌청하고 더 공기 좋은 밖을 두고 내가 굳이 실내에서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원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들이 많았다. 홍콩 인구가 대략 700만 명인데 그 중 30만 명이 외국에서 온 가정부다. 전체 인구의 약 4퍼센트이니 꽤 큰 집단이다. 홍콩은 인종 구성이 참 다양하다. 동남아 출신들도 꽤 많고,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도 많다. 인도 사람들도 많고 서양인도 많다.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도 매우 많다. 홍콩 토박이들도 깊이 따지면 다시 네 그룹으로 나뉜다.

그런데 나는 이 여러 집단들이 섞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홍콩 사람들은 실내에 있고 외국인 가정부들은 공원에 있다. 나만 이도 저도 아니다.

내가 본 홍콩은 다양한 집단이 서로 전혀 섞이지 않는 모자이크같은 도시다. 아니, 모자이크는 여러 점이 골고루 분포해 있기라도 하지, 홍콩은 비슷한 점 끼리 군집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 가깝다. 홍콩 사람들은 홍콩 사람들끼리만, 중국 본토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끼리만 주로 어울린다. 서양인들은 아예 모여 사는 지역이 정해져 있다. 주말이면 소풍을 나오는 외국인 가정부들도 출신 국가에 따라 모이는 공원이 다르다. 한국인, 일본인도 대부분 모여 산다. 한국 여행책에서 추천한 맛집에 가 보면 손님이 온통 한국 사람 뿐이다. 분명 같은 시간에 다른 어떤 식당에는 일본인들만 모여 있었으리라.

그래서 홍콩에서 6년을 살았어도 내가 아는 홍콩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광동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홍콩에서 이방인으로, 수박 겉만 핥으며 살 수밖에 없다. 가끔, 아주 가끔 광동어를 잘 배워서 외국인으로서 홍콩 토박이들의 사회에 잘 섞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여행책 제목마따나 홍콩을 100배 즐기고 있다.

말을 배운다는 건 사고방식과 문화를 배운다는 뜻이다.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을 두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보다 20살은 어린 사람이 나를 유(you)라고 불러도 기분나쁘지 않을 때가 영어를 제대로 배운 때이고,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을 때 아리가또가 아니라 스미마셍이 튀어나오는 때가 일본어를 제대로 배운 때다. 그래서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면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성격도 바뀌고 목소리 톤도 바뀐다.

올해에는 광동어 실력이 좀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6년간 이방인으로 살았으니 7년째에는 홍콩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년 청명절에는 그렇게 되어 있기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