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202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비행기를 탈 때의 복장은 편한 게 제일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특히나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흔히들 쪼리라고 부르는 플립플랍을 신고 바지도 통이 넓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디스크로 고생한 후로는 목베개와 허리 쿠션도 챙겨서 다닌다. 환승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서 오후 5시 이륙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는 그 때가 밤 1시였다. 미국에서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차적응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자 멜라토닌을 먹고 바로 잠을 청했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어서 피곤해서 그랬는지 멜라토닌이 잘 들어서 그랬는지 비행기에서 아주 잘 잤다. 아마도 둘 다 때문이었겠지. 중간에 깨서 기내식을 먹을 때에는 일본 비행기라 간만에 일본어도 써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주스 오네가이시마스 (주스 주세요)" 정도였지만.

 

얼마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샌프란시스코 기준으로는 아침이었기에 그 때부터는 커피를 마시며 기를 쓰고 깨어 있었다. "고히 오네가이시마스 (커피 주세요)." 창밖을 보니 땅이 보였다. 미국이구나. 주거 지역 바로 옆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이 없는 산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연, 그것도 그냥 자연이 아니라 대자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연. 이번 미국 여행의 목표 중 하나는 자연이었다. 홍콩에 살면서 도시는, 사람이 만든 물질 문명은 질릴 정도로 보았다. 1 제곱 킬로미터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98명이 살고 홍콩에서는 6300명이 산다고 한다. 한국은 516명.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알려면 꽃을 좀 볼 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멋지게 가꾸어 놓은 화단의 꽃이 아니라 산, 들, 길가에 스스로 피어 있는 그런 꽃들을 말이다. 사람으로 꽉 찬 도시에서는 자연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연은 사람이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무심하고 무정하다. 자연은 사람이 왜 자취를 감추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 작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인 임진왜란을 다룬 '칼의 노래'를 이렇게 시작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비행기는 점점 낮아졌고 내 아래에 있던 구름은 정확히 내 눈높이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미국에 왜 왔냐는 입국 심사 직원의 질문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돌아가는 항공권이 있냐길래 보여줬더니 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와서 LA에서 나가냐, LA까진 어떻게 갈 거냐고 물어왔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손으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더니 그렇게 운전한다고? 하며 되묻고는 오케이, 통과.

 

시차 덕분에 나중에 돌아갈 때 뱉어내게 될 하루를 벌었다. 회전초밥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짐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금속 문 위에 붙어 있는 문구가 나를 반겨줬다. 웰컴 투 샌프란시스코. 입국 심사 직원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서 뛰기 시작했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캘리포니아 2022 - 1. 과거라는 외국

 

미국에 가려면 출발 하루 전에 코로나19 PCR 검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의 보건소 격인 홍콩의 커뮤니티 센터에 미리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직원이 다음 날 아침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아침 비행기였기 때문에 결과가 조금만이라도 늦게 나오면 미국에 못 가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중 2시간 내로 결과가 나온다던 공항 내 검사소가 생각났다. 검사를 또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돈이 아까웠지만 이럴 땐 불확실성을 없애는 게 최선이다. 바로 공항으로 가서 검사를 받고 집에 오니 정말 곧 결과가 왔다. 음성이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가족이 홍콩에 있을 때 내가 집을 이렇게 오래 떠난 적은 처음이었기에 마음이 많이 쓸쓸했다. 출국 준비 기간 내내 슬펐고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슬펐다.

어쨌든 가야 하는 일이니 가야 했다. 한 시간 걸려 도착한 홍콩 공항은 썰렁했다. 이렇게 텅 빈 홍콩 공항은 본 적이 없었다. 새삼 코로나가 항공에 끼친 영향이 실감이 났다. 면세점 매장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비싼 양주 모형에는 먼지가 가득 앉아 있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공항 내 정수기가 다 폐쇄되어 있어서 일반 가격보다 훨씬 비싼 돈을 내고 음료수를 사 마셔야 했다. 그나마도 오전 8시가 되어서야 편의점이 문을 연 바람에 한참을 갈증에 시달리며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내 비행기는 홍콩에서 도쿄의 나리타 공항을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전일본공수(ANA) 편이었다. 오전 9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약 4시간을 날아 도쿄에 도착했다. 나리타 공항 역시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텅 빈 공항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갑자기 친구 T 생각이 났다. 일본에 살고 있는 T는 지금까지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약 8년 전 처음 만났던 때부터 서로 말이 너무 잘 통해서 곧바로 친해졌던 친구다. 근무시간일 것 같았지만 카톡을 보냈다. "T야 잘 지내? 지금 미국 가고 있는데 도쿄에서 환승하게 되어서 나리타 공항에 잠시 있어. 만나지는 못하지만 일본에 왔으니 연락하고 싶어서 카톡 보냈어 ㅋ"

바로 답장이 왔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T나 나나 한국을 떠나 산 지 참 오래 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든 안 하든 사회는 우리를 교포라고 부른다. 가끔씩 가 보는 한국은 갈 때마다 참 많이 변해 있고, 우리는 점점 우리가 우리나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한국을 떠났던 때는 2011년이었다. 2011년이면 갤럭시 S2가 나왔던 때다. 나는 한국을 떠날 때 요즘 말하는 피처폰을 쓰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국은 그 때에 멈추어 있다.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 영국의 소설가 L. P. 하틀리가 썼다는 이 말에 나는 절절히 공감한다. 지금의 한국에게 있어 나는 11년 전의 한국이라는 외국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느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한국인인데, 내 나라는 한국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이 내 모국어로 말이 통하는 외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과거라는 외국에서 온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T도 그 점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홍콩에 살고 있어서, T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한국이라는 외국 출신이어서 그렇다. 사람들은 교포 2세의 정체성 혼란에는 관심을 갖지만 교포 1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교포 1세들은 정체성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깨닫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교포 1세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는 혼란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은 그 혼란이 슬픔이 되곤 한다.

1.
인터넷에 접속하자 이어령 선생님의 저서에 관한 기사가 떴다. 눌러서 읽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고 이어령 선생은…"

뭐라고?

허겁지겁 다른 기사를 찾아봤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맞았다. 돌아가셨구나. 속보 기사가 뜬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2.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초등학생 고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당시 매달 사 보던 하우PC라는 컴퓨터 잡지에 이어령 선생님의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었다. 당시 어린이였던 나에겐 어렵고 관심도 가지 않는 내용이어서 대충 읽고 넘겼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것이 있었다. '아, 잘은 모르지만 엄청 유명한 분인가 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도 엄청 대단한 책인가 보네.'

3.
이어령 선생님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어느 날 서점에 갔는데 '디지로그(Digilog)'라는 책이 전시되어 있었고, 다음에 갔을 때에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 그 유명한 분 책이구나.'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체질인데도 희한하게 그 책들이 읽히지가 않았다. 몇 년 후, 이십 대 중반이 되었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셨지만 그래도 읽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꼭 자석의 같은 극끼리 밀어내듯이 나는 이어령 선생님의 책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4.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고, 그래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홍콩에 와서 살게 되었다. 간만에 짧게 한국에 갔다가 홍콩으로 돌아오던 30대 초반 어느 날이었다. 습관처럼 들어간 인천공항 서점에서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그 날은 선생님의 책과 내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 때까지 실은 서로를 밀어냈던 게 아니라 서로를 등 뒤에서 당기고 있었던 것인지 그 날 나는 그 책을 집어들고 계산을 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앉아서 책을 폈다. 그래, 그 유명한 분 책을 한 번 읽어보자.

바로 그 순간부터 비행기가 홍콩 첵랍콕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까지 나는 책에서 눈과 손을 떼지 못했다. 말과 기호를 통해 나라와 사회와 문명과 문화를 분석하는 그 방식에 반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그런 글은 본 적이 없었다.

5.
그 후 나는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닥치는대로 구해서 읽었다. 절판된 책은 중고서점을 뒤져서라도 찾아냈다. 어림잡아도 선생님의 책을 20권은 넘게 읽은 것 같다. 지금도 우리 집 책꽂이의 한 칸은 이어령 선생님의 책만으로 가득 차 있다.

다 너무나도 인상적인 책들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을 꼽자면 '축소지향의 일본인', '지성에서 영성으로',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개정판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세 권을 꼽고 싶고, 그 중에서도 딱 한 권을 골라야 한다면 주저없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선택하고 싶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를 하나의 단어로 관통해서 설명하는 책은 흔치 않을 것이요, 그 나라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 그 나라 말로 그 작업을 해냈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원래 일본어로 먼저 나오고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다). 이 책에 대해 많고 많은 평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평은 동경대 하가 도루 교수의 평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는 일본인의 자기 인식의 혁신은 있을 수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일본인이 한국에서 한국말로 이처럼 능란하게 한국 문화를 논할 날은 대체 언제쯤이면 올 것인가."

6.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펐다. 슬픈 마음에 홍콩에서 어디로 보낼지도 모르는 손편지를 몇 장에 걸쳐서 썼다. 편지 마지막 인사말은 이랬다. "선생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제게 복입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신문 기사와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유일하게 발견한 주소인 평창동의 영인문학관이라는 곳으로 국제우편을 보냈다. 그 해 말, 연말연시를 맞아 한국에 잠시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메일이 왔다.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긴 글 보낼 수 없지만 귀경 하시면 직접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신간이 나오면 증정본도 보낼 예정 입니다. 이어령 드림"

7.
메일을 받은 때로부터 10일 후 나는 난을 사 들고 평창동의 영인문학관으로 갔다. 비서님께서 나와서 맞아주셨다. 선생님께로 하루에도 수많은 연락이 오며 대부분은 비서님께서 거르시는데, 내 편지는 너무 구구절절해서 선생님께 전달해 드리셨다며, 편지를 영인문학관으로 보낸 것이 참 잘 한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선생님께서 신간 작업으로 바쁘신데 딱 30분 시간을 내셨다고 하셨다. 이윽고 방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렸다. 순간, 뭐랄까, 어렸을 때 자주 봤던 'TV는 사랑을 싣고' 느낌이 났고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 후 30분간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받아적을 시간도, 질문을 할 시간도 없었다. 마치 수압이 센 수도꼭지에서 물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나중에 집에 가서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정리해보니 A4 용지로 3장이 나왔다. 30분은 금방 흘렀고, 내가 처음 읽었던 선생님의 책인 '읽고 싶은 이어령'에 친필 서명을 받고 선생님과 사진을 찍은 뒤 인사를 드리고 영인문학관을 나왔다. 그 후 한두 달쯤 지나 선생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셨을 때 마무리 작업중이셨던 신간 '한국인 이야기'에 서명을 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8.
그 후 선생님과 더 연락이 닿은 일은 없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후에도 인터넷으로 선생님 소식을 종종 보고 강연 영상도 많이 찾아서 보았다. 치료를 할 시간에 글을 쓰겠다며 암 치료를 안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발 치료를 하셔서 더 오래 건강히 사셨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작년쯤이었을까, 신문과 뉴스에서 뵌 선생님은 내가 찾아뵈었을 때에 비해 눈에 띄게 수척해져 계셨다.

그리고 오늘 선생님은 고 이어령 선생님이 되셨다.

참 슬프다. 당신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실제로 선생님의 부고를 들으니 슬프고 정신이 없다. 선생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손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살짝 고쳐야 할 것 같다.

선생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이 제게 복입니다. 지난 번에 못 여쭤봤던 것은 나중에 천국에서 뵙고 많이 여쭙겠습니다.

'글쓰기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지되지 못한 커밋  (0) 2024.09.13
펄 쓰던 개발자의 회상  (0) 2022.08.23
리을 이야기  (2) 2022.01.10
번데기의 천국 - 모교의 폐교 가능성 소식에 부쳐  (0) 2021.06.04
너의 살았어야 했던 고향은  (0) 2021.04.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