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 중 "인생 뭐 있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자주 쓰이는 말이지만 이 말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인생에는 그 무엇도 없다"입니다. 여러 의미를 품고 있는 문장의 경우 외국어로 옮겨 보면 뜻이 명확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영어로 옮겨 보면 "There is nothing in life"가 되겠습니다. 인생 뭐 있나를 이 의미로 쓰는 경우 허무주의에 빠지고 삶의 의지를 잃게 되기 십상입니다. 혹은 인생이란 의미 없는 것이니 방종에 빠지자는 사고방식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지양해야 할 용법입니다.
두 번째 정반대의 의미는 "인생에는 걱정할 것이 그 무엇도 없다"입니다. 걱정할 것 대신에 두려워할 것, 겁먹을 것 등을 집어넣어도 말이 됩니다. 영어로 옮기면 "There is nothing to worry about in life"가 되겠습니다. 역시 nothing to worry about 대신에 nothing to fear 등으로 바꾸어도 뜻이 통하겠습니다. 이 경우 인생 뭐 있나라는 말은 긍정의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의 말이 됩니다.
이 외에도 세 번째 의미로 "인생에는 착하게 살 하등의 이유가 없다" 등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기도 하나, 그런 경우 한 눈에도 이상한 뜻임이 간파되는 바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인생 뭐 있나라는 말은 '뭐'가 수식하는 것이 '인생'인지, 아니면 문장에서 생략된 걱정, 두려움 등의 목적어인지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바뀝니다. 문장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숨어 있는 목적어를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 문장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뀝니다. 내 인생을 부정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나를 두렵게 하고 나를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을 훌훌 털어버리며 희망을 보게 되는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엔 무덤 주인은 무덤 사진 찍는 것을 정말 좋아할 것 같았는데 관리인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지난 2월에 이스라엘에 출장을 갔었다. 이스라엘까지 갔는데 예루살렘에 안 가볼 수는 없겠다 싶어 주말에 십만 원이 넘는 왕복 택시비를 써 가며 예루살렘에 다녀왔다. 예상치 못한 출장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야 스마트폰으로 정보 검색을 시작했다.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서기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지은 교회라고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님 무덤 장소가 비록 추정이라 할지언정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래서 성지 순례를 한번쯤은 가 봐야 한다. 내 경우는 성지 출장이었지만.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좀 걷다 보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 있는 곳이 있었다.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라고 했다. 인구밀도 높기로 소문난 홍콩도 그 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서 있었을지 아닌지야 누가 알겠나. 하지만 십자가는 예루살렘 그 어딘가에는 서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 전체에서 십자가가 서 있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그 곳이었을 것이라는 것 까지는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나도 거의 1시간 가량 줄을 서서 십자가가 박혀 있던 홈을 보았다.
십자가 자리를 보고 난 후에는 가뿐한 마음으로 교희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교회 건물 안에 또다시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그 건물을 빙 둘러 줄을 서 있었다. 저게 뭐지 싶어 그 곳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다. "웟 빌딩 이즈 댓? (What building is that?)"
그 사람이 얘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저스 툼. (Jesus' tomb.)" 예수님의 무덤.
난 성묘 교회가 예수님의 무덤 터에 세워진 건물인줄로만 알았지, 그 곳에 실제로 예수님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리고 그렇게 줄이 길 줄 알았으면 십자가 자리가 아니라 여기에 줄을 서는 건데. 시차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피곤해서 고민을 좀 하다가,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 무덤 안에 안 들어가보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줄을 섰다.
십자가 자리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가 정말로 예수님 무덤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제일 가능성이 높은 자리인 것은 맞을 것이다. 기독교를 로마에서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 황제가 예수님 무덤 자리를 찾으라고 시켰을 때에 신하들이 대충 아무데나 찍었다가는 반역 죄인이 되지 않았을까. 최소한도 당시, 서기 326년의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찾아낸 장소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약 300년 전, 대략 서기 26년 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직접 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는 부활을 믿었고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야 그 사람 시체가 아직도 여기 무덤에 있잖아!" 하고 말해주며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을 텐데 공교롭게도 그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모든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꼬이게 된다. 뭐야, 무덤이 비어 있잖아. 이건 분명 저 제자라는 놈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일 거야. 그런데 그 제자라는 사람들을 잡아서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그 중 몇을 죽이기까지 했는데도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난 예수를 자기들이 직접 보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자기 신념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야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지만, 자기들이 시체를 훔쳐 놓고 그 시체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며 목숨을 거는 비상식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설령 한두 명 정도는 존재할 수 있다고 쳐도 12제자 중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이 모두 그럴 수는 없었다. 목을 잘라 죽이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서 죽이고, 산 채로 솥에 넣어서 끓여도 그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자기들이 만났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무덤이 비어 있는 한 부활 반대론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그 빈 무덤이 중요하다. 부활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최소한 시신만큼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예수님의 무덤 안에 들어갔다. 빈 돌판이 있었다. 원래는 그 곳에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어 있었다.
안내원은 노 포토 플리즈를 외쳤지만, 그 무덤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내가 빈 무덤 사진을 찍는 것을 정말로 원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람들끼리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것이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일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자 손녀가 시험을 망쳤어도 별 것 아니라고 하신다. 재수를 하게 되어도 별 것 아니라고 하신다. 취업이 안 돼도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오늘 입맛이 없어서 저녁을 안 먹었다고 말씀드리면 표정이 바뀌시며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고령자들이 공유하는 이 정서가 앞으로 전 세계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도 매우 많이. 출산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동시에 평균 수명이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20대는 신기술에 열광한다. 새 핸드폰 디자인이 중요하고, 친구들과 연락을 할 때에 자기들의 감정을 잘 표현해 줄 최신 이모티콘을 써야 하고, 멋진 차를 타고 싶어한다. 그리고 기업은 그 수요를 만족시키는 상품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것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3년 전 스마트폰을 줘도 카톡 되고 인터넷 되면 됐지 싶다. 이모티콘은 친밀한 인간관계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는 튼튼하고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 자족, 화목, 평안, 안정, 익숙함 등의 단어와 점점 더 친밀해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모두 지금의 과학, 기술의 발전속도가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과연 그럴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이 사상을 고령화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유하게 될 것이다. 재수를 피하는 것 보다 끼니를 제 때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고가 점점 더 널리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 사회에서의 과학 및 기술 발전은 지금과는 그 형태가 매우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