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2022 - 7. 내 소리는 다음 사람에게 닿을 것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호곡장론(好哭場論)이라 불리는 유명한 글이 있다. 평생을 산이 가득한 조선에서 살던 박지원은 요동을 지나다가 처음으로 끝없는 벌판과 지평선을 보았고, 그 자리에서 감탄해서 "호곡장! 가이곡의. (好哭場! 可以哭矣.)" 라고 외쳤다. 한문으로 쓰다 보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했던 말은 "이야, 여기 진짜 울기에 좋은 곳이네! 정말 울어볼 만 하네!" 정도였을 것이다. 이 멋진 풍경을 보고 왜 하필이면 우냐는 일행의 말에 박지원은 아기도 태어나면 울지 않냐며, 갓 태어난 아기는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좁은 태중에 있다가 갑자기 무한히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자 속이 시원해서 크게 한바탕 우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처럼 자기도 지금 무한을 보게 되자 속이 시원해서 갓난아기처럼 울고 싶은 것이라고.

주차할 수 있도록 갓길이 확장된 곳에 차를 대고 문을 열자 바람 소리가 귀를 울렸다. 차에서 내리니 육중한 파도가 절벽과 암초를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무섭게 하얀 물보라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에 나오는 파도는 자기의 큰 힘을 아느냐 모르느냐고 호통을 쳤다지만 지금 이 파도는 그런 말조차 귀찮다는 듯,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자기의 거대함과 육중함, 무겁고 검푸른 물과 두텁고 하얀 물보라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나 홀로 갓길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박지원이 요동 벌판을 보고 정말이지 울기에 좋은 곳이라고 감탄했다던 이야기도 순간 생각이 났다. 열하일기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 순간 그 내용이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내가 살면서 읽었던 여러 문장 중 목놓아 울기에 좋은 곳이라는 바로 그 표현이 당시의 내 감정과 가장 비슷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선 채로 잠시 고민을 하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바람과 파도 소리가 워낙에 커서 내가 소리를 질러봤자 잘 안 들릴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견딜 수 없어서였다. 한참 길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서 또 다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속이 뻥 뚫렸다. 시대도 장소도 달랐지만 박지원도 요동 벌판을 보며 이런 기분이었을 것임을 감히 알 수 있었다.

호곡장론의 맨 끝에서 박지원은 울 만한 곳이 또 있다며 금강산과 황해도 몽금포 이야기를 꺼낸다.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동쪽 바다를 바라보면서, 황해도 몽금포의 모래사장을 걸으면서도 크게 울 만하다고. 박지원이 금강산 여행을 갔던 것은 29살이던 영조 41년, 1765년이었다. 박지원은 몰랐겠지만 그 때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를 향해 목놓아 울었던 박지원의 울음소리는 바닷물에 녹아들어 태평양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렇게 바다에서 257년을 떠돌다가 육중한 파도 소리가 되어 태평양 반대편에 서 있던 내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를 질러 그 소리에 화답했다. 내 소리 역시 대양을 돌고 돌다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의 소리로 내 소리에 화답할 것이다. 지금 이를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은 내 소리에 화답할 그 사람이 내 소리를 들었을 때에 그것이 내 소리인 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캘리포니아 2022 - 6. 맥주 마시던 어린이

십여 년 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는데 잘 해야 초등학교 3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빨대로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대낮에 아이가 맥주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마시고 있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캔에 beer라고 크게 쓰여 있는데도 주위의 어른들 중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에 두 번 놀랐었다. 신문에서 봤던 미국의 공교육 붕괴 기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척화비를 세우던 흥선대원군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니 인의예지가 없어도 너무 없네. 미국이 쇠락할 날이 멀지 않았구만.

그 아이가 마시던 것이 맥주가 아니라 루트 비어(root beer)라는 이름의 탄산음료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루트 비어는 이름과는 달리 맥주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음료수다. 맥주도 아닌데 이름에 왜 비어(beer)가 들어가는지 미국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맛은 뭐랄까, 수정과에 물파스를 섞고 탄산을 넣은 맛인데 이게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그 후로 나도 기회 될 때마다 찾아 마시곤 하게 되었다.

소살리토에서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햄버거집에서 루트 비어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주문을 했다. 예의 그 물파스 향이 코를 찔렀다. 동시에 십여 년 전의 맥주 마시던 어린이 사건도 다시금 떠올라서 조용히 혼자 씩 웃었다.

 

 

캘리포니아 2022 - 5. 뮤어 우즈, 직접 가 보아야 하는 곳

 

뮤어 우즈 국립 보호 구역(Muir Woods National Monument)은 세상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인 레드우드(Redwood)로 이루어진 숲이다. 이 숲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인 영화 혹성탈출을 통해서였다. 영화를 보며 ‘도시 바로 옆에 정말로 저렇게 큰 숲이 있다고?’ 하는 궁금증이 생겼었고, 학회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가게 되는 것이 확정된 다음부터는 뮤어 우즈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러던 중 마침 학회 일정 후로 예약해두었던 요세미티 당일 관광이 인원 미달로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요세미티는 다음에 가족과 함께 일정 길게 잡고 느긋하게 가라던 친구 K의 말이 생각나 잘 되었다 싶어 다른 요세미티 관광 상품을 알아보는 대신 뮤어 우즈에 가 보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현지 여행사 관광 상품을 예약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여행사 버스를 타러 숙소를 나섰다. 우연히도 버스 출발 위치가 숙소 바로 옆 골목이어서 참 편했다. 버스를 타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버스는 군데군데 관광 명소에 잠깐씩 멈추며 차이나타운을 거쳐 금문교를 지나 뮤어 우즈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가이드를 병행했는데 입담이 참 좋아서 모든 승객들이 다 즐거워했다. “이제부터 꼬불꼬불한 산길을 꽤 오래 가야 합니다. 바로 옆이 낭떠러지고 가드레일도 없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 운전 잘 해요. 바로 어제 운전면허 땄거든요.”

그렇게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한참 달려서 뮤어 우즈에 도착했다. “한 시간 반 자유시간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일단 버스 사진부터 찍었다. 십몇 년 전 오사카에서 도쿄로 심야버스를 타고 가던 중 휴게소에서 버스를 못 찾아 국제 미아가 될 뻔했던 이후로 생긴 습관이다.

뮤어 우즈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평생에 그런 숨은 처음 쉬어 볼 정도로 공기가 상쾌했고, 산 위라 그런지 꽤 쌀쌀했다. 입구 옆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버스에서 가이드가 뮤어 우즈의 개울은 빗물이 아니라 공기 중의 습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숲이 습하긴 했다. 하지만 뮤어 우즈의 습기는 도시의 끈적거리고 짜증나는 습기가 아니라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상쾌한 습기였다. 본격적으로 걷기 전 입구 바로 다음에 있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커피를 빼먹을 수는 없지. 추운 날씨에 얼어 있던 손이 커피 덕에 따뜻해졌다.

그 후 한 시간 반 동안은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우와, 정말 좋다” 라고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며 걷는 시간이었다. 너무 좋다, 정말 좋다라는 말만 입에서 계속 나왔다. 이 곳에 있는 레드우드들은 70미터 넘게 자란다고 했다. 대충 아파트 30층 높이. 레드우드는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굵기도 해서, 걷다가 발견한 속이 빈 레드우드 밑동 속에는 내가 열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수백 년 간 하늘로 곧게 굵게 자란 레드우드들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사이를 기분 좋게 걷고 또 걸었다. 너무나도 상쾌했다. 산림욕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 날의 기분은 나중에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낸 메시지로 남아 있다. “야, 나 피톤치드 인간이 된 기분이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전체 코스를 다 걸으면 5시간쯤 걸린다던데 맛보기만 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쉬웠다. 그 날의 일정을 다 취소하고 뮤어 우즈에 하루종일 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에 맞추어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정작 가이드가 숲을 걷다가 30분이나 늦게 와서 모두들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가이드도 뮤어 우즈가 너무 좋아서 시간도 잊고 한참을 걸었던 걸까.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드레일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다시 지나 다음 목적지인 소살리토로 향했다.

적당히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있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서 그 음식 자체에 빠져들게 되고, 적당히 멋진 경치는 보면서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절경(絶景) 앞에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비슷한 이유로 뮤어 우즈에서의 시간이 정말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뮤어 우즈를 글로 설명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뮤어 우즈는 말 그대로 ‘좋은’ 곳, 직접 가 보기 전에는 그 어떤 설명을 들어도 상상이 가지 않고 직접 가 보면 그 어떤 설명도 필요가 없는 그런 곳이다. 아쉽게도 글로도, 사진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니 이 곳에는 직접 가 보아야 한다.

 

 

캘리포니아 2022 - 4.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태평양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우리로 치면 지방도를 따라서 하루에 열 시간을 운전했던 날이었다. 도로 바로 옆으로 보이는 절벽과 태평양이 바람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모습은 정말 웅장했고 위엄이 넘쳤다.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새가 날면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떠 있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을 정도였고 파도는 가는 길 내내 어디에서나 무섭고 육중하게 절벽을 때리면서 하얗다 못해 창백한 물보라를 거대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치가 특히나 멋진 곳에는 vista point라는 이름의 전망 지점들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군데군데 비포장 갓길이 확장된 곳들이 있어서 잠시 내려서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경치가 너무 좋아서 중간중간에 계속 멈춰서 경치를 보다 보니 구글 지도에서는 6시간쯤 걸린다고 나온 거리를 가는 데에 시간이 거의 두 배로 걸렸다.

한 4시간가량 운전했을 즈음 조금씩 피곤이 몰려왔다. 근 10년 만에 운전대를 잡아서 긴장이 되어서 그렇기도 했겠고, 4시간이면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고도 남는 시간이니 피곤할 법도 했다. 빨리 어딘가에 내려서 좀 쉬고 커피를 사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가도가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집도 없고 가게도 없었다. 더 가다 보니 작은 마을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오길래 희망을 갖고 계속 달렸지만 도착했더니 마을 전체(그래봤자 건물 몇 개가 다였지만)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운전자들에게 휴게소 역할을 하던 마을이었던 것 같은데 안그래도 오지인 데다가 코로나까지 겹쳐서 사람이 오지 않자 사람들이 다 떠나간 것 같았다.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고 정신은 더더욱 멍해져만 갔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차 안에 짐을 놓고 주차해 놓으면 창문 깨고 훔쳐가는 나라에서 차를 갓길에 대고 잠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달리면서 빨리 마을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한국이었다면 아무리 산간 벽지여도 이 정도 달렸으면 모퉁이를 도는 순간 한방 오리백숙이나 옻닭 집 정도는 나왔을 텐데 정말이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길을 계속 달리다 보니 이제는 화장실까지 급해져 왔다. 그래도 화장실이 급해지자 그 덕에 잠은 좀 깼다. 이런게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건가. 하여튼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고 그저 살기 위해 계속 운전을 했다. 나중에는 머리가 멍한 것을 넘어서서 온 몸의 감각이 다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즈음 갑자기 반대편 차선 쪽으로 앞에 주유소가 보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주유소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힘을 내서 주유소로 들어갔다. 주유소로 들어가 차를 대고 내리는 순간 긴장이 확 풀리며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가게가 있었다. 미니 마트(mini mart)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다행히 몇 분 후 주인 할아버지가 와서 문을 열어주셨다. 이미 커피로 해결될 정도의 피곤이 아니었기에 레드불을 샀다. 가격이 엄청 비쌌지만 그 곳 까지의 운송비를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계산을 하려는데 기념품용 냉장고 자석이 보였다. 자석에는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I survived Pacific Coast Highway)'라고 쓰여 있었다. 태평양 해안 도로(Pacific Coast Highway, PCH)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 길 운전하는 게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다들 이쯤 오면 힘들어서 제 정신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공감가는 문구에 이끌려 그 냉장고 자석도 같이 샀다.

지금까지 살면서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라는 관점과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라는 관점, 이 두 관점만을 배우고 접해 왔다. 글쎄, 사회 전체나 인류 전체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 날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자연은 정복의 대상도 보호의 대상도 아닌, 내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자연 속에서 정복이나 보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면서 새삼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존엄성을 믿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사람이 자연을 두려워하거나 경외(敬畏)까지 하게 되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이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대자연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역시 한다. 그러고 나면 매일매일의 비슷한 일상 속에서도 냉장고에 붙어 있는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자석을 볼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 2022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소살리토(Sausalito)는 사부작사부작 걷기에 참 좋은 동네였다. 바닷가 길이 길지도 짧지도 않아서 햇살을 맞으며 이리저리 걸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한산해서 걷기에 참 좋았는데, 평소라면 관광객으로 꽉꽉 차 있을 동네였겠다 싶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페리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기에 마음 놓고 실컷 걸었다.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은 아름다웠고 그 너머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는 멋졌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갈매기는 생각보다 꽤 컸고 바닷가에 있는 뚱뚱한 바다사자 동상은 귀여웠다.

이리저리 걷던 중 갑자기 태평양 바닷물에 손을 한 번 담가보고 싶어졌다. 해변이 있는 게 아니라 바위로 된 방파제 바로 옆이 바다라서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던 중 갑자기 파도가 쳐서 신발이 다 젖었다. 그래, 이런 게 다 재미이고 추억이지. 그렇게 바닷가에 있던 중 뒤를 보니 어떤 사람이 바다 풍경을 찍으려고 엄청 큰 DSLR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빨리 비켜주었다. 그쪽에서는 몸짓으로 고맙다고 인사.

그렇게 바닷가 길을 왔다갔다하며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 아까 봐 둔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뭐지? 미국에서 나를 부를 사람은 없으니 나를 부른 게 아니겠지 하며 그냥 걸었는데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비니를 쓴 백인 남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전날 전철에서 동양인 혐오 시비에 걸린 적이 있어서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길래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바닷가 풍경 찍으러 나왔거든."
"응."
"근데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서 널 찍었어."
"뭐?"
"이거 봐봐."

보니 내가 바닷물에 손 담그고 있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큰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내가 바다 찍으라고 자리를 비켜줬던 그 사람이었다. 바다가 아니라 나를 찍고 있었구만.

"전화번호 알려주면 문자로 너한테 사진 보내줄게."
"아... 그래? 근데 나 여행객이라 외국 번호인데 되려나?"

써 놓고 나니 자연스럽게 번호 따는 방법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내 번호로 사진을 보내 봤지만 문자만 오고 사진은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그 사람이 "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라며 자기 전화에서 뭔가를 누르고 마이크에 뭐라고 말을 했다. 잠시 후 내 전화로 '你的膠片' (니더 자오피앤, '너의 필름' 이라는 중국어)라는 글과 함께 아이클라우드 다운로드 링크가 왔다. 아, 조금 전에 자기 전화에다가 음성 인식으로 '니더 자오피앤' 이라고 했던 거구나. 성조 때문에 照片(자오피앤, 사진)이 膠片(자오피앤, 필름)으로 잘못 인식된 것 같긴 하지만.

"우와, 너 중국말 해?"
"조금. 쓸 줄은 몰라."
"근데 나 한국 사람이야."
"아 그래? 그러면 스타크래프트 잘 해?"
"하긴 하는데 잘 하진 못해."
"무슨 종족 하는데?"
"프로토스."
"오, 나도 프로토스야."

프로토스가 주 종족이라니 근본이 된 친구임이 확실했다. 길가에서 둘이 셀카를 찍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바다에 손을 담그고 있는 내 사진은 내가 보기에 특별히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로토스가 주 종족인 친구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믿기로 했다.

대학생 때 화학 시간에 충돌 이론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반응물들이 서로 충돌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그 중 유효한 충돌도 많아지고, 그 결과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충돌이 다 유효한 충돌은 아니다. 쓸데없는 충돌도 분명 있다. 하지만 반응이 빨리 일어나려면 어쨌든 충돌이 많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 괜히 고백을 했다가 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이 충돌 이론이 떠오른다. 만남 중에는 물론 쓸데없는 만남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재미있는 만남도 많아지고 의미 있는 만남도 많아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 문화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문화이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다는 말과 함께 바닷물에 손 담그는 내 사진을 얻기도 했고 말이지. 이것이 미국 문화의 역동성이자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해 주는 요소이다.

 

캘리포니아 202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비행기를 탈 때의 복장은 편한 게 제일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특히나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흔히들 쪼리라고 부르는 플립플랍을 신고 바지도 통이 넓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디스크로 고생한 후로는 목베개와 허리 쿠션도 챙겨서 다닌다. 환승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서 오후 5시 이륙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는 그 때가 밤 1시였다. 미국에서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차적응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자 멜라토닌을 먹고 바로 잠을 청했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어서 피곤해서 그랬는지 멜라토닌이 잘 들어서 그랬는지 비행기에서 아주 잘 잤다. 아마도 둘 다 때문이었겠지. 중간에 깨서 기내식을 먹을 때에는 일본 비행기라 간만에 일본어도 써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주스 오네가이시마스 (주스 주세요)" 정도였지만.

 

얼마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샌프란시스코 기준으로는 아침이었기에 그 때부터는 커피를 마시며 기를 쓰고 깨어 있었다. "고히 오네가이시마스 (커피 주세요)." 창밖을 보니 땅이 보였다. 미국이구나. 주거 지역 바로 옆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이 없는 산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연, 그것도 그냥 자연이 아니라 대자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연. 이번 미국 여행의 목표 중 하나는 자연이었다. 홍콩에 살면서 도시는, 사람이 만든 물질 문명은 질릴 정도로 보았다. 1 제곱 킬로미터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98명이 살고 홍콩에서는 6300명이 산다고 한다. 한국은 516명.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알려면 꽃을 좀 볼 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멋지게 가꾸어 놓은 화단의 꽃이 아니라 산, 들, 길가에 스스로 피어 있는 그런 꽃들을 말이다. 사람으로 꽉 찬 도시에서는 자연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연은 사람이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무심하고 무정하다. 자연은 사람이 왜 자취를 감추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 작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인 임진왜란을 다룬 '칼의 노래'를 이렇게 시작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비행기는 점점 낮아졌고 내 아래에 있던 구름은 정확히 내 눈높이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미국에 왜 왔냐는 입국 심사 직원의 질문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돌아가는 항공권이 있냐길래 보여줬더니 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와서 LA에서 나가냐, LA까진 어떻게 갈 거냐고 물어왔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손으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더니 그렇게 운전한다고? 하며 되묻고는 오케이, 통과.

 

시차 덕분에 나중에 돌아갈 때 뱉어내게 될 하루를 벌었다. 회전초밥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짐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금속 문 위에 붙어 있는 문구가 나를 반겨줬다. 웰컴 투 샌프란시스코. 입국 심사 직원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서 뛰기 시작했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캘리포니아 2022 - 1. 과거라는 외국

 

미국에 가려면 출발 하루 전에 코로나19 PCR 검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의 보건소 격인 홍콩의 커뮤니티 센터에 미리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직원이 다음 날 아침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아침 비행기였기 때문에 결과가 조금만이라도 늦게 나오면 미국에 못 가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중 2시간 내로 결과가 나온다던 공항 내 검사소가 생각났다. 검사를 또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돈이 아까웠지만 이럴 땐 불확실성을 없애는 게 최선이다. 바로 공항으로 가서 검사를 받고 집에 오니 정말 곧 결과가 왔다. 음성이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가족이 홍콩에 있을 때 내가 집을 이렇게 오래 떠난 적은 처음이었기에 마음이 많이 쓸쓸했다. 출국 준비 기간 내내 슬펐고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슬펐다.

어쨌든 가야 하는 일이니 가야 했다. 한 시간 걸려 도착한 홍콩 공항은 썰렁했다. 이렇게 텅 빈 홍콩 공항은 본 적이 없었다. 새삼 코로나가 항공에 끼친 영향이 실감이 났다. 면세점 매장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비싼 양주 모형에는 먼지가 가득 앉아 있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공항 내 정수기가 다 폐쇄되어 있어서 일반 가격보다 훨씬 비싼 돈을 내고 음료수를 사 마셔야 했다. 그나마도 오전 8시가 되어서야 편의점이 문을 연 바람에 한참을 갈증에 시달리며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내 비행기는 홍콩에서 도쿄의 나리타 공항을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전일본공수(ANA) 편이었다. 오전 9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약 4시간을 날아 도쿄에 도착했다. 나리타 공항 역시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텅 빈 공항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갑자기 친구 T 생각이 났다. 일본에 살고 있는 T는 지금까지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약 8년 전 처음 만났던 때부터 서로 말이 너무 잘 통해서 곧바로 친해졌던 친구다. 근무시간일 것 같았지만 카톡을 보냈다. "T야 잘 지내? 지금 미국 가고 있는데 도쿄에서 환승하게 되어서 나리타 공항에 잠시 있어. 만나지는 못하지만 일본에 왔으니 연락하고 싶어서 카톡 보냈어 ㅋ"

바로 답장이 왔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T나 나나 한국을 떠나 산 지 참 오래 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든 안 하든 사회는 우리를 교포라고 부른다. 가끔씩 가 보는 한국은 갈 때마다 참 많이 변해 있고, 우리는 점점 우리가 우리나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한국을 떠났던 때는 2011년이었다. 2011년이면 갤럭시 S2가 나왔던 때다. 나는 한국을 떠날 때 요즘 말하는 피처폰을 쓰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국은 그 때에 멈추어 있다.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 영국의 소설가 L. P. 하틀리가 썼다는 이 말에 나는 절절히 공감한다. 지금의 한국에게 있어 나는 11년 전의 한국이라는 외국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느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한국인인데, 내 나라는 한국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이 내 모국어로 말이 통하는 외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과거라는 외국에서 온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T도 그 점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홍콩에 살고 있어서, T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한국이라는 외국 출신이어서 그렇다. 사람들은 교포 2세의 정체성 혼란에는 관심을 갖지만 교포 1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교포 1세들은 정체성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깨닫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교포 1세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는 혼란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은 그 혼란이 슬픔이 되곤 한다.

1.
인터넷에 접속하자 이어령 선생님의 저서에 관한 기사가 떴다. 눌러서 읽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고 이어령 선생은…"

뭐라고?

허겁지겁 다른 기사를 찾아봤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맞았다. 돌아가셨구나. 속보 기사가 뜬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2.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초등학생 고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당시 매달 사 보던 하우PC라는 컴퓨터 잡지에 이어령 선생님의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었다. 당시 어린이였던 나에겐 어렵고 관심도 가지 않는 내용이어서 대충 읽고 넘겼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것이 있었다. '아, 잘은 모르지만 엄청 유명한 분인가 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도 엄청 대단한 책인가 보네.'

3.
이어령 선생님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어느 날 서점에 갔는데 '디지로그(Digilog)'라는 책이 전시되어 있었고, 다음에 갔을 때에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 그 유명한 분 책이구나.'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체질인데도 희한하게 그 책들이 읽히지가 않았다. 몇 년 후, 이십 대 중반이 되었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셨지만 그래도 읽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꼭 자석의 같은 극끼리 밀어내듯이 나는 이어령 선생님의 책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4.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고, 그래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홍콩에 와서 살게 되었다. 간만에 짧게 한국에 갔다가 홍콩으로 돌아오던 30대 초반 어느 날이었다. 습관처럼 들어간 인천공항 서점에서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그 날은 선생님의 책과 내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 때까지 실은 서로를 밀어냈던 게 아니라 서로를 등 뒤에서 당기고 있었던 것인지 그 날 나는 그 책을 집어들고 계산을 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앉아서 책을 폈다. 그래, 그 유명한 분 책을 한 번 읽어보자.

바로 그 순간부터 비행기가 홍콩 첵랍콕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까지 나는 책에서 눈과 손을 떼지 못했다. 말과 기호를 통해 나라와 사회와 문명과 문화를 분석하는 그 방식에 반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그런 글은 본 적이 없었다.

5.
그 후 나는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닥치는대로 구해서 읽었다. 절판된 책은 중고서점을 뒤져서라도 찾아냈다. 어림잡아도 선생님의 책을 20권은 넘게 읽은 것 같다. 지금도 우리 집 책꽂이의 한 칸은 이어령 선생님의 책만으로 가득 차 있다.

다 너무나도 인상적인 책들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을 꼽자면 '축소지향의 일본인', '지성에서 영성으로',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개정판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세 권을 꼽고 싶고, 그 중에서도 딱 한 권을 골라야 한다면 주저없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선택하고 싶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를 하나의 단어로 관통해서 설명하는 책은 흔치 않을 것이요, 그 나라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 그 나라 말로 그 작업을 해냈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원래 일본어로 먼저 나오고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다). 이 책에 대해 많고 많은 평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평은 동경대 하가 도루 교수의 평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는 일본인의 자기 인식의 혁신은 있을 수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일본인이 한국에서 한국말로 이처럼 능란하게 한국 문화를 논할 날은 대체 언제쯤이면 올 것인가."

6.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펐다. 슬픈 마음에 홍콩에서 어디로 보낼지도 모르는 손편지를 몇 장에 걸쳐서 썼다. 편지 마지막 인사말은 이랬다. "선생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제게 복입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신문 기사와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유일하게 발견한 주소인 평창동의 영인문학관이라는 곳으로 국제우편을 보냈다. 그 해 말, 연말연시를 맞아 한국에 잠시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메일이 왔다.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긴 글 보낼 수 없지만 귀경 하시면 직접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신간이 나오면 증정본도 보낼 예정 입니다. 이어령 드림"

7.
메일을 받은 때로부터 10일 후 나는 난을 사 들고 평창동의 영인문학관으로 갔다. 비서님께서 나와서 맞아주셨다. 선생님께로 하루에도 수많은 연락이 오며 대부분은 비서님께서 거르시는데, 내 편지는 너무 구구절절해서 선생님께 전달해 드리셨다며, 편지를 영인문학관으로 보낸 것이 참 잘 한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선생님께서 신간 작업으로 바쁘신데 딱 30분 시간을 내셨다고 하셨다. 이윽고 방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렸다. 순간, 뭐랄까, 어렸을 때 자주 봤던 'TV는 사랑을 싣고' 느낌이 났고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 후 30분간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받아적을 시간도, 질문을 할 시간도 없었다. 마치 수압이 센 수도꼭지에서 물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나중에 집에 가서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정리해보니 A4 용지로 3장이 나왔다. 30분은 금방 흘렀고, 내가 처음 읽었던 선생님의 책인 '읽고 싶은 이어령'에 친필 서명을 받고 선생님과 사진을 찍은 뒤 인사를 드리고 영인문학관을 나왔다. 그 후 한두 달쯤 지나 선생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셨을 때 마무리 작업중이셨던 신간 '한국인 이야기'에 서명을 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8.
그 후 선생님과 더 연락이 닿은 일은 없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후에도 인터넷으로 선생님 소식을 종종 보고 강연 영상도 많이 찾아서 보았다. 치료를 할 시간에 글을 쓰겠다며 암 치료를 안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발 치료를 하셔서 더 오래 건강히 사셨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작년쯤이었을까, 신문과 뉴스에서 뵌 선생님은 내가 찾아뵈었을 때에 비해 눈에 띄게 수척해져 계셨다.

그리고 오늘 선생님은 고 이어령 선생님이 되셨다.

참 슬프다. 당신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실제로 선생님의 부고를 들으니 슬프고 정신이 없다. 선생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손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살짝 고쳐야 할 것 같다.

선생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이 제게 복입니다. 지난 번에 못 여쭤봤던 것은 나중에 천국에서 뵙고 많이 여쭙겠습니다.

'글쓰기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지되지 못한 커밋  (0) 2024.09.13
펄 쓰던 개발자의 회상  (0) 2022.08.23
리을 이야기  (2) 2022.01.10
번데기의 천국 - 모교의 폐교 가능성 소식에 부쳐  (0) 2021.06.04
너의 살았어야 했던 고향은  (0) 2021.04.09

1.
한국어에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ㅇ 7개의 받침 소리가 있다. 일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ㅅ, ㅆ 받침은 소리로는 ㄷ과 똑같다. 중국어(보통화)에는 ㄴ, ㅇ, R 3개의 받침이 있고 광동어에는 ㄱ, ㄴ, ㄷ, ㅁ, ㅂ, ㅇ 6개의 받침이 있다. 일본어에서는 ん이 ㄴ, ㅁ, ㅇ 받침 소리를, っ가 ㄱ, ㄷ, ㅂ 받침 소리를 내기 때문에 총 6개의 받침 소리가 나타난다.

2.
자세히 보면 한국어에만 유일하게 ㄹ 받침이 있다. 중국어로 숫자를 셀 때 우리가 흔히 이 얼 싼 쓰 하며 읽지만 사실 2의 중국어 발음은 얼이 아니라 어R에 가깝다. 다른 동아시아 언어, 예를 들어 몽골어 등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지만 어쨌든 ㄹ 받침이 한국어의 개성 포인트라고 해도 될 법하다.

3.
고전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 광동어와 한국어에 더 잘 남아 있다고 한다. 정작 지금의 북경 지역은 예전부터 여러 민족이 모여서 치고박고 하면서 발음이 섞여서 고전 한자 발음이 잘 안 남아 있다나. 그래서인지 광동어와 한국어의 한자 발음은 꽤 비슷하다. 시간(時間)을 예로 들어보면 중국어 발음은 싀지앤, 일본어 발음은 지깡이지만 광동어 발음은 시간이다.

4.
그런데 광동어와 한국어의 한자 발음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다. 광동어 한자 발음의 ㄷ 받침(ㅅ 받침) 소리가 한국어에서는 죄다 ㄹ 받침으로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숫자 칠(7)은 광동어로 '찻'이고 팔(8)은 '빳'이다. 주윤발은 '자우윤팟'이고 카페에서 음료를 뜨겁게 해 달라고 하려면 더울 열(熱)자를 써서 '잇'이라고 하면 된다.

5.
이 규칙을 발견하고 매우 신났었는데 알고 보니 언어학자들이 진작에 찾아 놓았던 것이었다. '운미 [t]의 [l]화'라는 전문가스러운 표현이 이미 있고, 학자들은 친절하게도 거기에 추가 설명까지 달아 놓았다. 고전 한자어의 ㄷ 받침이 한반도로 오면서 죄다 ㄹ 받침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즉 광동어의 한자 발음이 더 원조라는 소리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도 이 점이 신경쓰였는지 ㄹ 받침은 원래는 순우리말에서만 써야 하고 한자에는 쓰면 안 되는데 습관상 한자에도 ㄷ 대신 ㄹ 받침이 쓰이고 있다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且半舌之ㄹ, 當用於諺, 而不可用於文. 如入聲之彆字, 終聲當用ㄷ, 而俗習讀爲ㄹ, 盖ㄷ變而爲輕也.).

6.
왜 한국어에서는 ㄹ 받침이 번창하게 되었을까. 이런저런 설이 많은데 엄밀한 증명과 논문은 학계에 맡기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면 '그 발음이 당시 한국사람들에게 편했어서'가 그 이유였지 않을까. 지금도 거센소리보다 된소리, 예사소리가 더 편하기 때문에 오타쿠는 오덕후가 되고 배터리는 빳데리가 되고 있지 않나. 즉 한자가 한국어에 들어오기 전 부터 한국어에서는 ㄹ 받침이 엄청 많이 쓰이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7.
순우리말에서 ㄹ은 연속되는 소리나 동작을 나타낸다. 그래서 물은 '졸졸' 흐르고 불은 '활활' 타고 새는 '훨훨' 날고 추울 때 몸은 '덜덜' 떨리고 잠은 '쿨쿨' 자고 노래는 '랄랄라' 하고 부르고 돌은 '데굴데굴' 굴러간다. 반대로 ㄱ은 단절되는 소리나 동작을 나타낸다. 숨은 '턱' 막히고 길은 '꽉' 막히고 공은 손으로 '탁' 잡고 바둑돌은 '딱' 하고 내리치게 된다. 여기서 ㄱ을 ㄹ로 바꿔보면 느낌이 안 사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길이 '꽐' 막힌다고 하면 '꽉' 막힌다고 하는 것에 비해 느낌이 안 산다. '굴렁쇠'는 잘 굴러갈 것 같지만 '국겅쇠'라고 하면 이름만 들어도 답답하다.

8.
이어령 선생님께서 ㄹ의 연속성과 ㄱ의 단절성을 다 품고 있는 한국어 표현으로 자주 언급하시는 것이 떼굴 떼굴 떽떼굴이다. '굴'의 ㄹ 받침 때문에 뭔가 굴러가는 것 같다가 '떽'의 ㄱ 받침 때문에 멈추게 되고, 다시 떼굴 하면서 굴러가게 된다. 하여튼 한국어의 ㄹ은 단순한 음가가 아니다. ㄹ만으로도 연속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9.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 처럼 옛사람들은 ㄱ을 낫과 연결시켜 생각했다. 그러면 ㄹ은 어땠을까? 1800년대의 유명인 김삿갓의 시 중 이런 작품이 있다. 한자와 한글을 절묘하게 섞어서 쓴 시다.

腰下佩ㄱ(요하패기역)
牛鼻穿ㅇ(우비천이응)
歸家修ㄹ(귀가수리을)
不然點ㄷ(불연점디귿)

이 시는 김삿갓이 지나가는 머슴에게 길을 물었다가 무시를 당한 후 쓴 시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허리 아래에는 ㄱ을 달랑 차고,
소 코에는 ㅇ을 뚫었구나.
집에 가서 ㄹ을 수양해라.
안 그러면 ㄷ에 점 찍게 될 것이다.

ㄱ은 머슴이 허리에 찬 낫을, ㅇ은 둥그런 모양의 쇠코뚜레를, ㄹ은 한자 몸 기(己) 자를, ㄷ에 점을 찍는다는 것은 죽을 망(亡)자를 가리킨다. 즉 "허리에 낫 차고 소 코에 코뚜레 끼우고 가는 이 놈아, 집에 가서 자기 수양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된다. 김삿갓이 요즘 유행하는 프리스타일 랩 경연 프로그램에 나왔다면 엄청난 디스곡을 쏟아냈을 것 같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ㄹ을 볼 때 한자 몸 기(己) 자를 떠올렸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10.
다시 리을과 기역 이야기로 돌아와서, 순전히 아마추어이자 언어학 개론조차 안 들어본 일반인으로서 마음대로 추측해보자면 '살다', '죽다' 역시 ㄹ과 ㄱ의 법칙이 적용된 단어이지 않을까 싶다. ㄹ 받침은 동작의 이어짐이고 ㄱ 받침은 동작의 멈춤이다. '살다'는 누가 뭐래도 이어지는 것 아닌가. '죽다'는 멈추는 것이고. 혹시 또 모른다. 이것 역시 진작에 학자들이 찾아 놓은 것일지도. 어쨌든 그럴싸한 추측이지 않나.

11.
ㄹ과 ㄱ이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면 그 둘이 합쳐진 ㄺ은 어떤 뜻을 가지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ㄺ이 사용된 단어는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전부를 이 글에도 나열할 수 있다. 내가 찾은 건 15개인데 이게 전부일 것 같다.

동사 (11개): 갉다, 굵다, 긁다, 낡다, 늙다, 맑다, 묽다, 밝다, 붉다, 얽다, 읽다

명사 (4개): 닭, 삵, 칡, 흙

아마추어답게 무식하고 용감하게 때려맞춰 보자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보면 부드러운 것, 즉 ㄹ과 딱딱한 것, 즉 ㄱ이 함께 뒤엉켜 있는 상태에 ㄺ이 쓰이는 것 같다. 갉는 것은 딱딱한 것, 즉 ㄱ을 없애가는 ㄹ의 과정이지 않나. 긁는 것도 마찬가지고. 낡는 것은 생기가 넘치던 ㄹ이 딱딱한 ㄱ으로 변해가는 과정이고 얽는 것은 연한 것인 ㄹ과 딱딱한 것인 ㄱ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이다. 삵은 고양이처럼 귀여운 ㄹ이지만 맹수로서 사나운 ㄱ이고, 닭은 ㄹ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지만 얼마 못 날고 ㄱ이 되어 땅에 '뚝' 떨어지는 새다. 칡은 살아있는 ㄹ이지만 거칠고 딱딱한 ㄱ이고 흙도 부드러우면서 거칠다.

12.
모든 사람은 늙어가고 있다. 갓 태어난 신생아도 어제보다 오늘 하루만큼 늙은 것이다. 내가 어쭙잖게 생각해 본 ㄺ 이론대로라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즉 늙는다는 것은 부드러운 ㄹ과 딱딱한 ㄱ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이지 않나 싶다. 살아있는 ㄹ 받침에서 죽어있는 ㄱ 받침으로 가는 중간 과정이 늙어가는 ㄺ 받침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13.
모든 사람은 늙어가고 있기에 모든 삶은 ㄹ도 ㄱ도 아닌 ㄺ이다. 반대되는 두 개념, 모순되는 두 개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삶이다. 그리고 이 점을 예리하게 잡아낸 글들이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된다. 스탕달의 적과 흑은 적(赤)으로 상징되는 속(俗)과 흑(黑)으로 상징되는 성(聖)을 보여주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선과 악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모습을 다룬다. 2000년 전에 바울이 뭐라고 했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중략)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모순 속에서 살아있고자 발버둥 친 사람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리고 뒤에 덧붙는 말이 있다. "힘들어 죽겠네." 바울 정도나 되니까 고상하게 "이 사망의 몸에서..." 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14.
인간은 살아있는 한 이 ㄹ과 ㄱ의 모순을 절대로 혼자서 풀 수 없다. 그러한 시도는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항상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지상낙원이 없는 것이고 존 레논의 이매진은 아무리 노래 가사 속에서 존 레논이 자기는 몽상가가 아니라고 외쳐도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성과 속 사이에서 갈등하고 힘들어하다가 혹은 타협하고 혹은 은둔하고 혹은 타락하고 혹은 화를 내고 혹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꼬이게 되면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처럼 괜히 애먼 사람을 총으로 쏴서 죽이게 된다. 장담하는데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도를 하겠지만 바울의 방식 말고는 다 역시나 실패할 것이다. 바울의 해결 방법은 2000년 된 베스트셀러인 로마서에 이미 다 나와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찾아서 볼 일이다.

15.
ㄹ을 가지고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ㄹ은 5획이나 되는, 한글 자음 중 획이 가장 많은 글자다 (양심적으로 쌍자음, 겹자음은 제외하자). 오른쪽으로 가는 듯 하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왼쪽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다시 아래로 내려간 뒤 오른쪽으로 빠진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 한글 자음에서 ㄹ만 글자가 만들어진 원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에는 왜 ㄹ을 하필이면 딱 그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훈민정음은 구강구조를 시각화한 ㄱ, ㄴ, ㅁ, ㅅ, ㅇ 5개가 기본 자음이며 거기에 발음이 세게 나면 획을 더하는 식으로 해서 ㄱ에서 ㅋ을, ㄴ에서 ㄷ과 ㅌ을, ㅁ에서 ㅂ과 ㅍ을, ㅅ에서 ㅈ과 ㅊ을, ㅇ에서 된이응 ㆆ과 ㅎ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옛이응 ㆁ, ㄹ, 반치음 ㅿ에 대해서는 ㅇ, ㄴ, ㅅ에 비해 발음이 세게 나는 것은 아니지만 모양을 다르게 하기 위해서 ㅇ, ㄴ, ㅅ에 획을 더해서 만들었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其因聲加畫之義皆同. 而唯ㆁ爲異. 半舌音ㄹ, 半齒音ㅿ, 亦象舌齒之形而異其體, 無加畫之義焉.) 이 중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글자는 ㄹ 하나뿐인데, 즉 ㄹ은 ㄴ과 비슷한 소리이지만 ㄴ에 획을 더한 ㄷ, ㅌ이 ㄴ보다 소리가 센 것에 비해 ㄹ은 ㄴ에 획이 엄청 많이 추가되었지만 소리가 센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16.
ㄹ의 이러한 특성이 삶의 특성이지 않나 싶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것은 규칙 안에 넣고 싶어하지만 결국 삶에는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 그런데 무시할 수도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말, 즉 자연어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만든 훈민정음이지만 ㄹ처럼 이질적인 글자가 존재하고, 세상 그 어떤 자연어도 문법에 예외가 없는 경우는 없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 유명한 노래 Love me tender는 ('텐더야, 나를 사랑하거라' 가 아닌 이상) 문법적으로 틀렸다. Love me tenderly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외와 시적 허용이 나타나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고, 이런 요소들이 언어를 풍성하게 한다. 이런 불확실한 요소들을 다 제거해서 명확하게 만든 언어들도 있는데 대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언어들이다. C, C++, 자바, 파이썬, 어셈블리....

17.
그러니 규칙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더라도 여유를 잃지 말자.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가 감히 덧붙이자면 그러한,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바로 우리네 삶을 삶 답게 만들어주는 요소이다. 이 글의 맨 앞에서 ㄹ이 한국어의 특성이라고 말했던 것 처럼. 그러니 우리도 청자 연적이라는 각자의 삶에 있는 꽃잎 하나 정도는 약간 옆으로 꼬부리자. 그 꼬부라진 꽃잎 하나가 삶을 삶 답게 만들어준다. 삶의 원형인 살다라는 동사에도 ㄹ 받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LNK2019 _main"int __cdecl invoke_main(void)" (?invoke_main@@YAHXZ) 함수에서 참조되는 확인할 수 없는 외부 기호

이 에러는 대부분의 경우 현재 프로젝트에 main() 함수가 없어서 생깁니다. 아무 메인 함수나 만들어주면 잘 실행됩니다. 예를 들어 int main() { return 0; } 과 같은 빈 메인 함수 하나만 넣어 주셔도 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