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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rtDialog.Builder를 사용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에러입니다.

new AlertDialog.Builder(getApplicationContext())new AlertDialog.Builder(this) 로 바꾸시면 해결됩니다.

한국어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 중 "인생 뭐 있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자주 쓰이는 말이지만 이 말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인생에는 그 무엇도 없다"입니다. 여러 의미를 품고 있는 문장의 경우 외국어로 옮겨 보면 뜻이 명확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영어로 옮겨 보면 "There is nothing in life"가 되겠습니다. 인생 뭐 있나를 이 의미로 쓰는 경우 허무주의에 빠지고 삶의 의지를 잃게 되기 십상입니다. 혹은 인생이란 의미 없는 것이니 방종에 빠지자는 사고방식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지양해야 할 용법입니다.

두 번째 정반대의 의미는 "인생에는 걱정할 것이 그 무엇도 없다"입니다. 걱정할 것 대신에 두려워할 것, 겁먹을 것 등을 집어넣어도 말이 됩니다. 영어로 옮기면 "There is nothing to worry about in life"가 되겠습니다. 역시 nothing to worry about 대신에 nothing to fear 등으로 바꾸어도 뜻이 통하겠습니다. 이 경우 인생 뭐 있나라는 말은 긍정의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의 말이 됩니다.

이 외에도 세 번째 의미로 "인생에는 착하게 살 하등의 이유가 없다" 등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기도 하나, 그런 경우 한 눈에도 이상한 뜻임이 간파되는 바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인생 뭐 있나라는 말은 '뭐'가 수식하는 것이 '인생'인지, 아니면 문장에서 생략된 걱정, 두려움 등의 목적어인지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바뀝니다. 문장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숨어 있는 목적어를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 문장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뀝니다. 내 인생을 부정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나를 두렵게 하고 나를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을 훌훌 털어버리며 희망을 보게 되는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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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포토 플리즈. (No photo, please.)"

내 생각엔 무덤 주인은 무덤 사진 찍는 것을 정말 좋아할 것 같았는데 관리인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지난 2월에 이스라엘에 출장을 갔었다. 이스라엘까지 갔는데 예루살렘에 안 가볼 수는 없겠다 싶어 주말에 십만 원이 넘는 왕복 택시비를 써 가며 예루살렘에 다녀왔다. 예상치 못한 출장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야 스마트폰으로 정보 검색을 시작했다.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서기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지은 교회라고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님 무덤 장소가 비록 추정이라 할지언정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래서 성지 순례를 한번쯤은 가 봐야 한다. 내 경우는 성지 출장이었지만.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좀 걷다 보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 있는 곳이 있었다.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라고 했다. 인구밀도 높기로 소문난 홍콩도 그 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서 있었을지 아닌지야 누가 알겠나. 하지만 십자가는 예루살렘 그 어딘가에는 서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 전체에서 십자가가 서 있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그 곳이었을 것이라는 것 까지는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나도 거의 1시간 가량 줄을 서서 십자가가 박혀 있던 홈을 보았다.

십자가 자리를 보고 난 후에는 가뿐한 마음으로 교희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교회 건물 안에 또다시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그 건물을 빙 둘러 줄을 서 있었다. 저게 뭐지 싶어 그 곳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다. "웟 빌딩 이즈 댓? (What building is that?)"

그 사람이 얘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저스 툼. (Jesus' tomb.)" 예수님의 무덤.

난 성묘 교회가 예수님의 무덤 터에 세워진 건물인줄로만 알았지, 그 곳에 실제로 예수님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리고 그렇게 줄이 길 줄 알았으면 십자가 자리가 아니라 여기에 줄을 서는 건데. 시차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피곤해서 고민을 좀 하다가,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 무덤 안에 안 들어가보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줄을 섰다.

십자가 자리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가 정말로 예수님 무덤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제일 가능성이 높은 자리인 것은 맞을 것이다. 기독교를 로마에서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 황제가 예수님 무덤 자리를 찾으라고 시켰을 때에 신하들이 대충 아무데나 찍었다가는 반역 죄인이 되지 않았을까. 최소한도 당시, 서기 326년의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찾아낸 장소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약 300년 전, 대략 서기 26년 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직접 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는 부활을 믿었고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야 그 사람 시체가 아직도 여기 무덤에 있잖아!" 하고 말해주며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을 텐데 공교롭게도 그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모든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꼬이게 된다. 뭐야, 무덤이 비어 있잖아. 이건 분명 저 제자라는 놈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일 거야. 그런데 그 제자라는 사람들을 잡아서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그 중 몇을 죽이기까지 했는데도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난 예수를 자기들이 직접 보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자기 신념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야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지만, 자기들이 시체를 훔쳐 놓고 그 시체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며 목숨을 거는 비상식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설령 한두 명 정도는 존재할 수 있다고 쳐도 12제자 중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이 모두 그럴 수는 없었다. 목을 잘라 죽이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서 죽이고, 산 채로 솥에 넣어서 끓여도 그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자기들이 만났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무덤이 비어 있는 한 부활 반대론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그 빈 무덤이 중요하다. 부활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최소한 시신만큼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 시간을 기다려서 드디어 예수님의 무덤 안에 들어갔다. 빈 돌판이 있었다. 원래는 그 곳에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어 있었다.

안내원은 노 포토 플리즈를 외쳤지만, 그 무덤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내가 빈 무덤 사진을 찍는 것을 정말로 원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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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끼리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것이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일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자 손녀가 시험을 망쳤어도 별 것 아니라고 하신다. 재수를 하게 되어도 별 것 아니라고 하신다. 취업이 안 돼도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오늘 입맛이 없어서 저녁을 안 먹었다고 말씀드리면 표정이 바뀌시며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고령자들이 공유하는 이 정서가 앞으로 전 세계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도 매우 많이. 출산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동시에 평균 수명이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20대는 신기술에 열광한다. 새 핸드폰 디자인이 중요하고, 친구들과 연락을 할 때에 자기들의 감정을 잘 표현해 줄 최신 이모티콘을 써야 하고, 멋진 차를 타고 싶어한다. 그리고 기업은 그 수요를 만족시키는 상품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것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3년 전 스마트폰을 줘도 카톡 되고 인터넷 되면 됐지 싶다. 이모티콘은 친밀한 인간관계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는 튼튼하고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 자족, 화목, 평안, 안정, 익숙함 등의 단어와 점점 더 친밀해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모두 지금의 과학, 기술의 발전속도가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과연 그럴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이 사상을 고령화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유하게 될 것이다. 재수를 피하는 것 보다 끼니를 제 때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고가 점점 더 널리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 사회에서의 과학 및 기술 발전은 지금과는 그 형태가 매우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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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서 길게 뻗어나온 것을 '가락'이라고 한다. 손에서 길게 뻗어나온 것은 손가락, 발에서 나온 것은 발가락, 머리에서 나온 것은 머리카락이다. 엿을 길게 뽑아 늘리면 엿가락이고 노래를 한 곡 뽑으면 노래가락이다. 밥 한 술, 두 술 할 때의 술이 길어지면 숟가락이고 수저의 저가 길게 생겼으면 젓가락. 국수를 길게 뽑으면 국수가락.

우리가 보통 가야라고 부르는 고대 국가는 원래는 가야, 가라, 가락, 임나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원래는 자기네 명칭이 있었는데 한자로 소리나는 대로 옮기다 보니 여러 비스무리한 명칭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편 지금은 고구려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라고 부르지만 사실 당시에는 고구려를 그냥 고려라고 종종 불렀다. 그러니까 고구려든 고려든 이름은 다 고려였던 셈.

그리고 한국이라고 할 때의 韓이라는 글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기기도 더 전인 먼 옛날에 한반도 남부에 있던 마한, 진한, 변한을 나타낼 때에 쓰인 글자이다. 그런데 그 먼 옛날, 대충 2000년 전의 한자 발음은 당연하겠지만 지금과 많이 달랐다. Baxter & Sagart (2014)의 중국 상고 한자음 연구에 따르면 韓의 당시 발음은 아마도 '가르'였다고 한다. 지금의 ㅎ 발음이 당시에는 ㄱ이었고, 지금의 ㄴ 받침은 당시에는 ㄹ이었기 때문이라고.

가라(가야), 고려(고구려), 가르(韓). 다 ㄱㄹ이다.

아마 고대 한국어에서 나라를 가리키는 단어의 자음이 ㄱㄹ이었고, 그걸 한자로 음차하다 보니까 가라, 고려, 韓(가르) 라는 표기가 나왔던 것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요즘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겨레라는 단어도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있고.

나라 이름에 대해 여기까지는 학자들이 연구한 이야기였고, 아래부터는 내가 생각 가는대로 막 붙인 이야기.

한 나라도 아니고 마한, 진한, 변한 셋 씩이나 되는 나라가 뒤에 韓(가르)을 붙이고 있었다면 당시 사람들이 무슨 그 글자를 무슨 뜻으로 사용했을지 짐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은 지금도 자국어로 이름이 '랜드(land)'로 끝난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네덜란드, 스위스(Switzerland), 독일(Deutschland) 등. 랜드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이 경우는 좀 예외지만)에 공통적으로 붙는 '스탄'도 땅이라는 뜻이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하다면 韓(가르)도 땅과 관련된 단어이지 않았을까.

가락(ㄱㄹ)이라는 단어와 엮어서 생각해보면,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땅이 쭉쭉 뻗어나간 것이라고 인식했던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동네 땅의 이름이 마, 진, 변이지 않았을까. 마의 땅이 뻗어나갔으니 마한, 진의 땅이 뻗어나갔으니 진한, 변의 땅이 뻗어나갔으니 변한. 그러다가 길이 뻗으면 거리(ㄱㄹ), 사람들이 세대를 거쳐 뻗어나가면 겨레(ㄱㄹ). 그러고보니 물이 길게 뻗은 강의 순우리말도 가람(ㄱㄹ)이다. 비전공자가 마음대로 해 본 생각이지만, 만약 이게 맞다면 그 가락(ㄱㄹ, kr)은 코리아(kr)라는 이름을 통해서 전 세계로 뻗어나갔으니 정말이지 이름대로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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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지난 1월 3일에 이어령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집필 작업으로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 주시고 많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수압이 센 곳에서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 처럼 선생님의 입에서는 지식과 통찰력이 터져 나왔습니다. 메모를 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기자였다면 녹음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들은 내용을 일차로 정리해보자 5000자, 대략 원고지 25매, A4 용지 3장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를 정리하여 글로 남겨봅니다.

선생님은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기호는 물질입니다. 기호가 담겨 있는 글자도 물질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호와 문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물질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손에 도끼가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끼 자루도 바꾸고 날도 바꾸다가 결국 다 바꾸었으면 도끼란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이 물질과 비물질을 설명해 줍니다. 지금까지의 서양 문명은 물질로서의 기호에만 집중해왔으며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면서 언어론의 syntax와 semantics를 떠올렸습니다. 또한 말씀하시면서 클로드 섀논의 정보 이론까지 다루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섀논을 알고 있었지만 새삼 선생님의 지식에 놀랐던 순간이었습니다. 도끼 이야기에서는 테세우스의 배가 생각났습니다.

비물질, 즉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DNA는 물질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은 비물질입니다. 지금까지의 과학과 공학은 물질로서의 기호, bit 그 자체에만 집중해왔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이고 한계입니다.

과거에는 지혜(이 경우 통찰력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당해 보입니다)에서 지식이, 지식에서 정보가, 정보에서 데이터가 축적되었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데이터에서 정보가, 정보에서 지식이, 지식에서 지혜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각광을 받는 세계적인 AI, IT 기업들은 데이터와 정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기업들은 10년 후 매우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인문학, 예를 들자면 철학이 중요해지는 때가 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왜 사는지가 중요해지는 때가 다시 옵니다.

직업은 갈수록 줄어들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직업이 사라져가는 역사입니다. 예전에는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지금은 6-8%만 농업을 합니다. 앞으로는 일과 관심사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지금은 소수의 문인과 가수 등만 그렇게 살지만 앞으로는 모두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게 된다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AI 부흥도 전망에 상관 없이 자기가 하고 싶던 연구를 십여 년 간 붙잡고 있던 힌튼 교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의 좋은 예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불 대수(Boolean algebra)를 언급하시고 힌튼 교수의 선조가 불 대수를 만든 조지 불인 이야기를 하시더니 곧이어 존 매카시와 AI의 혹한기, 재부흥까지 말씀하셔서 전공자로서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이러면서 이야기의 주제가 자연스레 AI로 넘어갔습니다. 지금의 AI가 잘 작동하게 된 것은 애매모호함, 즉 어중간함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애매모호함'을 잘 다루는 것이 바로 한국인입니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맥주 한 두서너 병'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두세 병을 달라고 했다면 그것은 부정확입니다. 그러나 '한 두서너 병'을 달라고 한 것은 유연성, 플렉서빌리티(flexibility)입니다. 이 유연성 때문에 AI 사회에서 한국인이 강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평소에 AI와 컴퓨터공학을 연구하면서 고민하던 것에 대해 개인적인 질문을 드렸고, 그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이 있는 답을 주셨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이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라 이 글에는 적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께서 머리 속에 넘쳐나고 있는 지식과 생각을 한 글자라도 더 저에게 말씀해주시려고 하는데 제가 질문을 하는 바람에 흐름이 끊긴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S급의 주제에 대해 말씀하시는 와중에 제가 B급의 질문을 드린 기분이었습니다. 제 질문이 B+ 급만이라도 되었다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미래 산업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5개 분야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는 먹거리, 둘째는 생명, 마지막은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먹거리는 농업을 포함하는 개념이고, 생명은 의학쪽으로 발전할지 인공 생명으로 발전할지는 미지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와 넷째는 기억이 나지 않아, 대화 때 메모를 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하여 BTS를 언급하시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레 선생님의 오래된 관심사인 문화론으로 넘어갔습니다. BTS는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명법입니다. 나누고 분류하기 좋아하는 서양 문화로는 한국어로 방탄소년단이 되거나 영어로 뭔가 번역된 이름이 되거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BTS는 알파벳으로 쓰기는 했지만 방(B)탄(T)소년단(S)이라는 한국어의 약자일 뿐입니다. 서양인들은 영어면 영어고 한국어면 한국어이지 이런 식의 명명은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인이 가진 장점, 융합시키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서양 문화는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2항 대립입니다. 하지만 동양 문화는 3항 순환입니다. 가위바위보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순환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순환으로 가야 합니다. 노를 저을 때 '어기'는 힘을 빼는 동작이고 '차'는 힘을 쓰는 동작입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어기'와 '차' 사이에 '여'가 들어가서 '어기여차'가 됩니다. 비유하자면 서양 문화는 어기차, 한국 문화는 어기여차인 것입니다. 어기와 차 사이에 어기도 차도 아닌 '여'를 집어넣은 것에 한국 문화의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의 다음 일정이 있으셔서 아쉽지만 인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져간 책에 선생님의 인삿말을 받았습니다.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 덕분에 선생님의 다른 책들을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19년이라고 쓰셨다가 2020년으로 고치시는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했지만 빠진 내용이 참 많습니다. 새삼 신문에 나오는 선생님 인터뷰 내용에는 빠진 것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곧 나올 다음 책이 정말로 기대됩니다. 바쁘신 중에도 불러 주시고 만나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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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때문에 10년만에 도쿄에 갔다. 그 사이에도 몇 번 일본에 간 적은 있었지만 도쿄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홍콩에 있다가 도쿄에 가니 땅이 참 넓었다. 홍콩에 살다 보면 길에서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것과 고층 건물 때문에 하늘을 못 보는 것이 일상이 되기 마련인데 도쿄에서는 길이 넓어서 걷기에 편했고, 고층 건물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하늘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땅은 넓은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왜 그럴까 고민하던 중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고, 저녁 식사 때문에 식당에 들어갔다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여백이 없어서 그랬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책 광고는 안그래도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로 가득 차 있었다. 여백도 없어서 광고판 테두리 직전까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국에서는 박찬호 선수가 인스타그램에 일기를 논문 수준으로 빼곡히 쓴다고 화제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라면 아무런 화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광고 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철 역사도 온갖 표지판과 안내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승에 대한 표지판이 있으면 또한 그 표지판의 위치를 알려주는 화살표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계단에는 모든 칸마다 우측통행이라고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여백을 채우고 채우다 도저히 그 무엇도 붙일 수 없을 만한 곳이 나타나면 뜬금없는 문구라도 붙여 놓았다. "안전제일"

그렇게 지하철에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에도 여러 가지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은 역시나였다. 의자에 앉았는데 그 순간 식탁과 의자 사이 공간에 참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가방 놓을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을 보게 되었다. '여백이 없구나'라고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땅 좁고 사람 많은 것으로는 일본이 홍콩을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넓게 산다. 식당 테이블이 4인용이면 그냥 거기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이 별 거리낌 없이 바로 앞자리에, 심지어 어떤 때는 옆자리에 와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게 될지언정 홍콩 사람들은 4인용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일본 유명 라면집에 가면 한국 독서실 스타일로 1인용 식탁을 만든 뒤 칸막이까지 쳐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모르는 사람과 겸상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문화는 개인에게 그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대신 그 사람의 공간은 그만큼 작아졌다. 칸막이가 차지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400짜리 식탁을 홍콩식으로 4명이 공유하면 누군가는 120을 쓰고 누군가는 80을 쓰겠지만 식탁 400 전체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일본식으로 칸막이를 치고 다 조각조각 나누어 놓게 되면 모든 사람이 각각 90씩을 쓰고 칸막이가 40을 차지하게 된다. 그 칸막이만큼 일본은 좁아진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히 보장해 주는 대가는 공간의 축소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니 수저통도 다 따로 놓아 주어야 하고 컵도 각각 따로 쌓아 놓아야 한다. 홍콩식이었으면 하나만 있었으면 될 수저통이 네 개가 되어야 하고, 그 만큼 개인의 공간은 더더욱 줄어든다.

또한 개인 공간 보장은 각 개인의 무한한 책임을 수반한다. 내 공간 안에서 내가 겪는 문제에 대해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알아서 다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맙습니다(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가 아니라 미안합니다(스미마셍)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를 '메이와쿠'라고 한다) 안 그래도 좁은 내 공간 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넣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여백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광고판을 보니 역시나 일본어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하지만 한국어에는 있는 띄어쓰기가 일본어에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주욱 그럴 것이다. 그 띄어쓰기의 공간만큼 한국인은 일본에서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일본인은 한국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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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에 이공계 장학금이라는 게 생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의약계통을 제외한 이공계 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이었다. 등록금 지원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교재비까지 주는 획기적인 장학금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공계가 인기가 없어서였다. 당시 이과 수능 응시생은 문과 응시생의 절반이었다. 나라에서 보기에 이공계가 중요해 보이는데 고등학생들이 이공계 진학을 하지 않으니 돈을 주기로 한 것이었고, 다른 말로 하자면 이공계의 전망은 나라에서 돈을 줘야 할 정도로 깜깜하다는 것을 나라가 인정한 꼴이었다. 돈 받아도 안 가는 이공계가 돈을 내면서도 가는 다른 학과와 비교된 것은 덤이었다.

2010년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신문을 볼 때마다 이공계로 수험생들이 몰린다는 기사를 보게 되는 요즘에는 참 생소하게 들릴 10여년 전 이야기이다. 왜 10여 년 전에는 돈을 준대도 기피대상이던 이공계에 지금은 사람이 몰릴까. 이공계 장학금을 꾸준히 줘 왔어서? 아니다. 장담하는데 이공계 장학금 제도를 지금 갑자기 없애 버려도 이공계로 여전히 사람이 몰릴 것이다. 예전에 법대와 의대로 지원자가 몰렸던 게 장학금 때문은 아니었지 않는가. 사람들은 전망을 본다. 당장 등록금을 많이 내더라도 졸업 후에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그 학과에 지원하고, 반대로 장학금을 많이 받을 수 있더라도 졸업 후의 전망이 어두컴컴하면 그 학과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입시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저출산에 대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본 신문 기사에는 2006년 부터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69조 원을 썼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세계 최저의 출산률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공계 장학금과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첫째 낳으면 얼마, 둘째 낳으면 얼마, 셋째 낳으면 얼마, 어린이집 얼마 식으로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해준다는 소식을 보며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애 낳아서 키우는 게 나라에서 돈을 줄 정도로 기피할 만한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결한 것이 이공계 장학금이 아니라 좋아진 이공계 졸업 후의 전망이었듯, 저출산 해결은 정부 보조금이 아니라 육아가 즐거울 것이라는 전망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있다. TV에 연예인들이 나와서 예능이라는 미명 하에 결혼생활을 무슨 인생의 파멸마냥 이야기하며 히죽거리는 한, 어린이집에서 무 한 조각으로 수십명 치의 무국을 끓였다는 소식이 들리는 한, 중고등학생들이 같은 반 친구를 피범벅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는 뉴스가 들리는 한, 대졸자들이 집을 사려면 20년 동안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다 모아야 하는 한 269조가 아니라 더 큰 돈을 쏟아부어도 출산률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말이 있다. 진짜 보물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법이다. 출산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울 귀한 일인데 그 귀한 출산에 대한 문제를 돈을 퍼부어서 해결하려 했기에 역대 정책이 다 실패한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즉 어슴푸레한 새벽의 아름다움,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시원한 바람 소리, 투명하게 빨간 단풍잎, 쨍한 겨울 하늘을 국민들이 마음 놓고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을 내 자식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자녀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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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자려는데 목이 따갑고 눈이 가려웠다. 먼지가 많은가 하고 창문을 열자 갑자기 공기청정기가 세게 돌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눈이 엄청 따가워졌다. 최루탄이었다. 전철역 한 정거장 건너에서 쏜 최루탄이 바람을 타고 우리 동네까지 온 모양이었다.

11월 12일 화요일 밤에 홍콩 중문대학에서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천 발 넘게 쐈다고 한다. 훈련소에서 받았던 화생방 훈련이 생각이 났다. 학교 캠퍼스 한 곳에 최루탄 천 발이 떨어지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건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사용하는 폭력은 최소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홍콩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시위대가 전철역으로 도망가자 역 입구를 다 막은 뒤에 역 안에 최루탄을 쐈다. 마치 꼭 벌레 잡으려고 연막탄 치는 것 처럼. 최루탄 천 발이 떨어진 중문대학도 입구는 막혀 있었다.

실제로 홍콩 경찰들이 시위대를 바퀴벌레, 광동어로 갓잣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시위대를 사람이 아니라 벌레로 보고 있으니 그렇게 진압을 과격하게 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홍콩 경찰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시위대를 바퀴벌레라고 부른 그 순간에 그들은 시위대에게 이미 진 것이다. 인류 역사에 걸친 사람과 바퀴벌레의 싸움에서 승자는 언제나 바퀴벌레였으니. 홍콩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고 싶으면 시위대가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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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토치 (PyTorch)] IndexError: invalid index of a 0-dim tensor. Use tensor.item() to convert a 0-dim tensor to a Python number

 

0.5 이전 버전의 파이토치에서 작성된 코드를 0.5 이후 버전에서 돌리다 보면 위와 같은 에러가 날 때가 있습니다. 파이토치의 데이터 자료 구조가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코드에서 변수.data[0] 인 부분을 변수.data 로 바꾸어주시면 해결됩니다.

 

참고한 곳: https://github.com/NVIDIA/flownet2-pytorch/issues/113#issuecomment-45080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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