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거창하게 썼는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면서 비전공자이니까 틀려도 창피하지 않다는 뻔뻔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꽃들도" 라는 CC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花も(하나모)" 라는 일본 찬양인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구전되어 온 찬양이라고 한다. 멜로디만 들어보면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듯한 전형적인 일본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매우 일본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다음 가사이다.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花も雲も風も大海も)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奏でよ奏でよイエスを)


꽃, 구름, 바람, 넓은 바다 순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다. 꽃보다는 구름이 크고 구름보다는 바람이 더 활동 범위가 넓다. 바람과 바다는 비교하기가 애매한데 그래서인지 굳이 "넓은"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이게 왜 특이하냐 하면 일본 문화는 이어령 씨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에서 볼 수 있듯 큰 것을 작게 만드는(응축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해당 책 초반부에 언급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하이쿠를 보자.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동해에서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 게와 눈물 순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령 씨는 이를 두고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꽃들도"의 가사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 전형적인 일본 노래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가사가 다음과 같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불러보면 확실히 일본 정서가 더 잘 느껴진다.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작은 꽃들도

(海も風も雲も小花も)


그러면 왜 "꽃들도" 에서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단어들이 배치되었을까? 노래나 시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사고방식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에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감정으로 옳은 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면 시인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이다.) 이 노래는 찬양이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6)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령 비움이라는 말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작업이고 명상은 내 속을 비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묵상은 있어도 명상은 없다. 채우려면 꽃이 구름과 바람과 큰 바다가 되어야지 바다가 작은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꽃들도"의 가사 순서가 저렇게 일본적이지 않은 순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 왜 마지막이 넓은 땅이 아니라 하필이면 넓은 바다여야 했을까. 다음 구절이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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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이어령 씨가 일본어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에는 일본론 10대 명저에 뽑히기까지 했다. 이 책에 대한 많은 평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경대 교수 하가 도루 씨의 평이다. "일본인이 한국에서 한국말로 이처럼 능란하게 한국 문화를 논할 날은 대체 언제쯤이면 올 것인가."

이 책은 이전 일본론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국화와 칼"을 위시해서 서양에서 출판된 수많은 일본론의 많은 부분은 사실 일본론이 아니라 동북아론이었다는 것. 바닥에 앉고 젓가락을 쓰고 쌀밥을 먹는 일본인들을 보며 서양인들은 그것이 일본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면 일본인이 쓴 일본론은 괜찮을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스스로를 서양과는 끊임없이 비교했으면서도 정작 바로 옆나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교류해 온 한국과는 비교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이어령 씨는 그 한 예로 일본에서 나온 책에 일본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던 나라라는 이야기가 실렸던 것을 지적한다. 똥 얘기로 굳이 다투고 싶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시작되는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과장을 보태지 않고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 마다 감탄이 나오는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나 같은 뜻의 단어가 서로 다른 언어에서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지를 파고드는 이어령 씨의 글쓰기 스타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에, 일본어를 공부해 본 사람에게는 이 책의 재미가 세 배, 네 배 배가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어령 씨의 접근 방식, 즉 일본을 알려면 일본을 한국과 비교 및 대조해보아야 한다는 말은 한국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느 나라 론(論)이라는 것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이 지구에 나라가 오직 한국 하나 뿐이라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홍콩에 살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 사람들은 큰 것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스케일이 크지 않냐고? 중국 사람 이름에서 작을 소(小)자를 보기는 쉬워도 클 대(大)자를 보기는 어렵다.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이소룡(李小龍)은 작은 용(小龍)이지 큰 용이 아니었고, 개혁개방을 추진했던 인물은 등소평(鄧小平)이었지 등대평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이름 앞에 작을 소(小)자를 붙여서 부른다. 중국의 유명 IT 기업인 샤오미는 중국어로 좁쌀이라는 뜻인데 한자를 글자 그대로 보면 小米, 작은 쌀이 된다.

한국은 어떤가? 이름에 클 대(大)가 들어간 한국 사람은 많이 봤어도 작을 소(小)가 들어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홍콩 옆 마카오에 가면 한국 최초의 로마 가톨릭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발등 뼈와 목상이 있다. 우리나라 15대 대통령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었다. 다 이름에 클 대(大)가 들어간다. 13대 대통령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이름에는 클 대(大)보다도 더 큰 클 태(泰)가 들어가 있다. 하다못해 컵라면도 왕(王)뚜껑이라고 부르는 게 한국식 이름이다. 회사 이름에도 대우, 대림처럼 클 대(大)를 쓰면 썼지 작을 소(小)를 쓰지는 않는다.

스마트폰은 컴퓨터를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든 물건인데, 이게 한국에 들어오자 크기가 커졌다. 한국인보다 평균 체구가 큰 미국인을 대상으로 만든 아이폰의 화면 크기는 2011년 10월에 발표된 아이폰 4s 시절까지 3.5인치였는데, 한국에서는 2011년 9월에 5.29인치짜리 갤럭시 노트가 나왔다. 물론 2010년에 델 스트릭이라는 제품이 나오기는 했었지만 실질적으로 패블릿 시대를 연 것이 갤럭시 노트라고 말하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왜 한국인은 큰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일본이 섬나라라고 하지만, 사실 일본은 혼슈만 해도 한반도보다 클 정도로 넓은 나라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는 SUV까지도 소형으로 만들고, 왜 한국에서는 큰 차가 인기가 많은지. "축소"라는 키워드로 일본을 읽어보는 것 처럼 "거대화"라는 키워드로 한국을 읽어보는 것이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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