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말의 '그'는 남자도 여자도 다 될 수 있는, 성별과 관계가 없는 단어입니다. 성별을 확실히 하고 싶으면 '그 남자', '그 여자' 같이 쓰면 됩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만화 제목에도 "그 남자 그 여자"라는 표현이 나오고, 아직도 '그'의 반말형인 '걔'에는 성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자를 '그'로, 여자를 '그녀'로 쓰는 글이 많이 보입니다. 아마 영어의 he와 she를 번역하던 사람들이 이런 용법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문어체에서만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요즘은 드라마 등에서 구어체로까지 사용이 됩니다.

영어는 무조건 성별을 밝혀야 하는 언어이지만 한국어는 성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언어입니다. 눈사람만 해도 우리말에서는 눈 + 사람이지만 영어에서는 snow + man, 눈 남자가 됩니다. 이렇게 man이 남자도 되고 사람도 되는 영어의 특징이 반지의 제왕 영화판에 잘 나옵니다. "그 어떤 사람(man)도 나를 죽일 수 없다!"라고 괴물(나즈굴)이 말하자 공주(에오윈)가 "나는 남자(man)가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괴물을 베어 버립니다.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되는 대사입니다. 한국어의 '사람'이라는 말은 남녀를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영어는 이 성별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불특정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he라고 쓰나 she라고 쓰나 충분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he or she나 s/he라고 쓰면 글이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오죽하면 성별에 상관없는 ze라는 단어를 만들자는 말까지 나올까요.

애초에 한국어의 '그'는 이런 성별 문제가 없는 편리한 단어인데 번역가들이 이 편리한 단어를 망쳐버렸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남자는 '그 남자', 여자는 '그 여자', 그리고 성별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은 '그'라고 쓰는 용법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영어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을 지칭하려고 새로운 단어까지 만드는데, 왜 우리는 이미 있는 좋은 '그'라는 단어를 자꾸 반쪽으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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