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이 다 다르듯 구미권의 나라들도 다 다르니 그네들을 서양이라고 퉁치려면 참 무리가 따르겠다 싶지만, 자기들끼리 유럽 연합이니 나토니 하는 것을 만들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서양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중일 3국이야 좋으나 싫으나 역사로 엮여 있는 나라들이고, 동남아 국가들과도 아세안 플러스 한중일 해서 꽤 가깝게 지내니 동양이라는 어정쩡한 말도 아주 못 쓸 말은 아닐 것이다. 하여간 지금 쓰려는 것은 논문이 아니라 일요일 오후의 끄적임이기에 이렇게 모호한 용어를 있는 그대로 모호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원래 모호한 것에 대해 말해야 어줍잖은 지식으로 썰을 풀고 약도 팔 수 있는 법이다.

서양의 숫자는 7이다. 일주일은 월화수목금토일 7일이다. 계이름도 도레미파솔라시 7개다. 카지노에서는 777이 나와야 대박이다. 무지개는 서양에서도 나라에 따라 5개, 6개라고 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빨주노초파남보 7색이다. 백설공주 옆에는 여섯도 여덟도 아닌 일곱 난장이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7이 좋은 숫자이다 보니 7에서 하나가 빠진 6은 나쁜 숫자다. 그래서 666이 악마의 수가 되지 않았나.

반면 동양의 숫자는 5다. 계이름이 궁상각치우든 중임무황태든 하여튼 5개다. 윷놀이에도 도개걸윷모 5개의 경우가 있다. 얼굴을 찌푸려도 오만상을 찌푸리지 육만상이나 칠만상을 찌푸리지는 않는다. 화투를 쳐도 새를 다섯 마리 모으면 어원이 小鳥(kotori) 이든 五鳥(gotori) 이든 어쨌든간에 고도리가 돼서 좋다. 무지개도 오색무지개라고는 해도 칠색무지개라고는 안 한다. 5가 이렇게 좋은 수인데 방위는 동서남북 네 개 밖에 없으니 어쩌지 하다가 어거지로 중앙이라는 개념을 끼워넣어서 어쨌든 오방을 만들어서 오방색을 정한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멋진 산들이 많은데도 꼭 다섯 개씩만 모아서 오악이라고 한다. 오곡밥은 있어도 육곡밥, 칠곡밥은 없다. 하다못해 독수리도 오형제여야 했고 후레쉬맨에서도 옛날 옛날 먼 옛날에 하필이면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저 멀리로 사라졌어야 했다. 미국에서 만든 파워 레인저도 다섯 명이지만 그건 미국에서 일본 전대물을 수입해가서 그렇다.

사족을 달자면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가지 힘이 하나로 모인 캡틴 플래닛은 숫자가 5이지만 굉장히 서양적인 만화인데, 왜냐하면 이 만화의 5는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다가 마음을 덧붙여서 나온 숫자라서 그렇다. 비슷한 개념이 적용된 것으로 프랑스 감독 뤽 베송의 영화 제 5원소가 있다.

다시 돌아와서, 5와 7 두 숫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서양의 7은 기독교에서 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7일동안 만드셨기에 7이 좋은 숫자이다. 동양의 5는 오행사상에서 왔다. 오행에는 목화토금수 다섯 개념이 있다. 나무, 불, 흙, 쇠, 물이 서로 물고 물린다. 행성 이름도 얘네들을 따서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다. 그래서 뒤쪽 행성들은 붙일 이름이 마땅치 않아 서양에서 쓰는 그리스 신 이름을 번역하는 바람에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같은 이질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근대에 서양 달력을 쓰게 됐는데 일주일이 7일이니 목화토금수를 다 가져다 붙여도 이틀이 비어서 해와 달까지 끌어들여 일요일과 월요일을 만들어야 했다.

요즘 우리는 오색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으로 부르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동양의 5색 무지개가 서양에서 7색이려면 몇몇 색들이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어의 '푸른색'이 영어에서는 파란색과 초록색 두 개로 갈라진다. 우리가 신호등의 초록색 불을 보고 "야 파란불이다 빨리 건너자" 하는 게 다 그런 흔적이다.

동양 전통이 5, 서양 전통이 7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숫자는 뭘까.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 5나 7중 하나만 고집할수는 없다. 5만 고집하기엔 7이 우리 삶 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 반대로 5를 다 버리고 7로 갈아타자고 하는 것은 우리 문화 속에 5가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결국 두 숫자 중 무엇을 고르더라도 포기한 것 때문에 잃는 것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5와 7을 평균내서 6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건 꽝이다. 5 입장에서 보면 6은 쓸데없고 거추장스러운 것 하나를 더 달고 있는 숫자다. 더 심각하게도 7 입장에서 보면 6은 666에서 볼 수 있듯 악마의 숫자다. 6이 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옛말따나 죽도 밥도 아니다. 연예계에서 이런 식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가 국내 인기도 잃고 해외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 얻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이러느니 차라리 5만 하든지 7만 하든지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낫다. 어줍잖은 퓨전 음식을 만드느니 차라리 한식과 양식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좋은 것과 같다.

둘째는 5냐 7이냐라는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5, 7)이라는 이차원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5, 7)이 되면 5한테는 "나는 x축으로 5에요"라고, 7한테는 "나는 y축으로 7이에요"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을 만족스럽게 포함하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방식은 또다른 문화권을 새로 접하더라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차원만 늘리면 되니까.

그런데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해야 (5, 7)이 될 수 있을까.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5와 7 양쪽 모두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잘 알아야 그 다음에 뭘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때문에 영어공부를 하면서도 5때문에 국문학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쇼팽과 베토벤을 들었으면 대금 산조도 좀 들어봐야 하고, 유럽 배낭여행 갔다 왔으면 국내 여행도 다녀봐야 한다. 아무리 내가 속해있는 문화권이라고 해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그 다음으로는 어느 하나도 버리지 말고 둘 다 잘 잡고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양쪽을 잘 알아도 사람이라는 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으로만 쏠리기가 쉽다. 그래서 5로 쏠리면 국수주의, 요즘 인터넷 용어로 국뽕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7로 쏠리면 사대주의자나 자국 혐오자, 요즘 말로 국까가 되게 된다. 양쪽 예 둘다 SNS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게 적었지만 결국 줄이면 지피지기(知彼知己) 네 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5와 7이 전쟁중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자병법을 인용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어쨌든 사실 지피지기(知彼知己)만 보는 것 보다는 다음에 오는 네 글자까지 함께 봐야 더 의미심장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절대로 위태롭지 않다. 이 말대로라면, 반대로 5만 알거나 7만 알면 언젠가는 반드시 위태로운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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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이어령 씨가 일본어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에는 일본론 10대 명저에 뽑히기까지 했다. 이 책에 대한 많은 평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경대 교수 하가 도루 씨의 평이다. "일본인이 한국에서 한국말로 이처럼 능란하게 한국 문화를 논할 날은 대체 언제쯤이면 올 것인가."

이 책은 이전 일본론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국화와 칼"을 위시해서 서양에서 출판된 수많은 일본론의 많은 부분은 사실 일본론이 아니라 동북아론이었다는 것. 바닥에 앉고 젓가락을 쓰고 쌀밥을 먹는 일본인들을 보며 서양인들은 그것이 일본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면 일본인이 쓴 일본론은 괜찮을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스스로를 서양과는 끊임없이 비교했으면서도 정작 바로 옆나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교류해 온 한국과는 비교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이어령 씨는 그 한 예로 일본에서 나온 책에 일본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던 나라라는 이야기가 실렸던 것을 지적한다. 똥 얘기로 굳이 다투고 싶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시작되는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과장을 보태지 않고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 마다 감탄이 나오는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나 같은 뜻의 단어가 서로 다른 언어에서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지를 파고드는 이어령 씨의 글쓰기 스타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에, 일본어를 공부해 본 사람에게는 이 책의 재미가 세 배, 네 배 배가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어령 씨의 접근 방식, 즉 일본을 알려면 일본을 한국과 비교 및 대조해보아야 한다는 말은 한국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느 나라 론(論)이라는 것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이 지구에 나라가 오직 한국 하나 뿐이라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홍콩에 살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 사람들은 큰 것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스케일이 크지 않냐고? 중국 사람 이름에서 작을 소(小)자를 보기는 쉬워도 클 대(大)자를 보기는 어렵다.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이소룡(李小龍)은 작은 용(小龍)이지 큰 용이 아니었고, 개혁개방을 추진했던 인물은 등소평(鄧小平)이었지 등대평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이름 앞에 작을 소(小)자를 붙여서 부른다. 중국의 유명 IT 기업인 샤오미는 중국어로 좁쌀이라는 뜻인데 한자를 글자 그대로 보면 小米, 작은 쌀이 된다.

한국은 어떤가? 이름에 클 대(大)가 들어간 한국 사람은 많이 봤어도 작을 소(小)가 들어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홍콩 옆 마카오에 가면 한국 최초의 로마 가톨릭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발등 뼈와 목상이 있다. 우리나라 15대 대통령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었다. 다 이름에 클 대(大)가 들어간다. 13대 대통령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이름에는 클 대(大)보다도 더 큰 클 태(泰)가 들어가 있다. 하다못해 컵라면도 왕(王)뚜껑이라고 부르는 게 한국식 이름이다. 회사 이름에도 대우, 대림처럼 클 대(大)를 쓰면 썼지 작을 소(小)를 쓰지는 않는다.

스마트폰은 컴퓨터를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든 물건인데, 이게 한국에 들어오자 크기가 커졌다. 한국인보다 평균 체구가 큰 미국인을 대상으로 만든 아이폰의 화면 크기는 2011년 10월에 발표된 아이폰 4s 시절까지 3.5인치였는데, 한국에서는 2011년 9월에 5.29인치짜리 갤럭시 노트가 나왔다. 물론 2010년에 델 스트릭이라는 제품이 나오기는 했었지만 실질적으로 패블릿 시대를 연 것이 갤럭시 노트라고 말하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왜 한국인은 큰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일본이 섬나라라고 하지만, 사실 일본은 혼슈만 해도 한반도보다 클 정도로 넓은 나라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는 SUV까지도 소형으로 만들고, 왜 한국에서는 큰 차가 인기가 많은지. "축소"라는 키워드로 일본을 읽어보는 것 처럼 "거대화"라는 키워드로 한국을 읽어보는 것이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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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절이다. 홍콩에서는 이 날이 꽤 중요한 휴일이다. 청명절이 되면 홍콩 사람들은 아침부터 조상들의 묘를 찾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성묘를 가는 셈인데, 흙을 둔덕처럼 쌓아 놓고 풀이 자라게 하는 우리 무덤과는 달리 홍콩 무덤은 돌로 되어 있어서 벌초를 할 일은 따로 없다.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보통 향을 피우고 내려온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공동묘지 입구이기 때문에 청명절은 일년 중 우리 집 근처에 사람이 제일 많은 날이다. 휴일이라 오랜만에 늦잠을 잔 뒤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공동묘지로 가고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경찰들까지 와서 일종의 사람 교통정리를 해 주고 있었다.

밀렸던 집 청소를 하고 늦은 오후에 집에서 슬슬 나왔다. 청명절은 24절기에서 춘분 다음이라 대충 겨울이 다 지나가고 봄 기운이 완연해질 즈음이 되어 집 청소하기에 좋은 날이다. 설렁설렁 전철역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평소에 자주 가는 카페에 왔다. 간만에 읽을 책도 한 권 가지고.

그런데 카페가 꽉 차 있었다. 인구밀도가 높은 홍콩에서 카페에 자리가 없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했다. 보통은 모르는 사람과 테이블을 같이 쓸 정도로는 자리가 있는데 오늘은 정말 카페가 빽빽했다. 나보다 먼저 커피를 산 사람들이 자리가 비기만 하면 가서 앉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하다가 그냥 커피를 사 들고 바깥 공원 벤치로 나왔다. 더 밝고 더 쾌청하고 더 공기 좋은 밖을 두고 내가 굳이 실내에서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원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들이 많았다. 홍콩 인구가 대략 700만 명인데 그 중 30만 명이 외국에서 온 가정부다. 전체 인구의 약 4퍼센트이니 꽤 큰 집단이다. 홍콩은 인종 구성이 참 다양하다. 동남아 출신들도 꽤 많고,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도 많다. 인도 사람들도 많고 서양인도 많다.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도 매우 많다. 홍콩 토박이들도 깊이 따지면 다시 네 그룹으로 나뉜다.

그런데 나는 이 여러 집단들이 섞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홍콩 사람들은 실내에 있고 외국인 가정부들은 공원에 있다. 나만 이도 저도 아니다.

내가 본 홍콩은 다양한 집단이 서로 전혀 섞이지 않는 모자이크같은 도시다. 아니, 모자이크는 여러 점이 골고루 분포해 있기라도 하지, 홍콩은 비슷한 점 끼리 군집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 가깝다. 홍콩 사람들은 홍콩 사람들끼리만, 중국 본토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끼리만 주로 어울린다. 서양인들은 아예 모여 사는 지역이 정해져 있다. 주말이면 소풍을 나오는 외국인 가정부들도 출신 국가에 따라 모이는 공원이 다르다. 한국인, 일본인도 대부분 모여 산다. 한국 여행책에서 추천한 맛집에 가 보면 손님이 온통 한국 사람 뿐이다. 분명 같은 시간에 다른 어떤 식당에는 일본인들만 모여 있었으리라.

그래서 홍콩에서 6년을 살았어도 내가 아는 홍콩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광동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홍콩에서 이방인으로, 수박 겉만 핥으며 살 수밖에 없다. 가끔, 아주 가끔 광동어를 잘 배워서 외국인으로서 홍콩 토박이들의 사회에 잘 섞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여행책 제목마따나 홍콩을 100배 즐기고 있다.

말을 배운다는 건 사고방식과 문화를 배운다는 뜻이다.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을 두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보다 20살은 어린 사람이 나를 유(you)라고 불러도 기분나쁘지 않을 때가 영어를 제대로 배운 때이고,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을 때 아리가또가 아니라 스미마셍이 튀어나오는 때가 일본어를 제대로 배운 때다. 그래서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면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성격도 바뀌고 목소리 톤도 바뀐다.

올해에는 광동어 실력이 좀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6년간 이방인으로 살았으니 7년째에는 홍콩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년 청명절에는 그렇게 되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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