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 없이 카톡 친구 명단을 죽죽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150년을 살것처럼 인생을 계획하고 내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는 프로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지내는 고등학생의 프로필 문구였다. 그때는 '그래 나도 학생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하고 웃으며 지나갔는데 그 후로 자꾸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잊을만 하면 다시 떠올라서 머리가 복잡했다. 보아하니 저절로 없어질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아예 작정하고 진지하게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내일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출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사는 것'의 모범답안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문장을 약간 바꿔 보았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고 하면 분석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프로필 문구에 특허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조금 바꾸면 뭐 어때.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은 내일 죽을 확률, 모레 죽을 확률, 글피에 죽을 확률 등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모든 날이 동등하게 중요해지고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지 않게 되니 하루하루를 똑같이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 되겠다. 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매일매일이 다 똑같으니 그냥 일상 속에서 살아가라' 라고 하고 끝내면 뭔가 싱겁고 허전하다. 그래서 더 파고들어 봤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 말 속에 심오한 사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의 유익을 알았다. 라틴어 경구 중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 사람들은 저렇게 경구를 만들어야만 겨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배고파 죽겠네, 웃겨 죽겠네, 졸려 죽겠네 하는 식으로 죽음을 상기해오고 있었다. 뭐뭐 해서 죽겠다는 표현을 부정적이라고 금지시킬 것이 아니다. 금지시켜야 할 것은 똑같은 말인데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 하면 괜히 멋있어 보이고 한국어로 배고파 죽겠다고 하면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그 사대주의다.

하여튼간에 삶은 죽음을 인식할 때에 농밀(濃密)해진다. 몇년 전부터 유행하는 말 중에 욜로(YOLO)라는 것이 있다. You Only Live Once, 직역하면 너는 딱 한번 산다는 말인데 뒷일 생각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질러버리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21세 청년이 트위터에 욜로라고 적어놓고 시속 190km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일이 그 한 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욜로가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뜻이어도 You Will Surely Die, '너는 언젠가 반드시 죽어'라는 문구가 있다면 욜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를 것이다. 적어놓고 나니 저런 문구가 이미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man is destined to die once)" 라는 성경 구절이다.

고등학생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에서 시작된 생각이 메멘토 모리와 욜로를 거쳐서 성경까지 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해결을 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맘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카톡을 켜 봤더니 그 학생이 그새 프로필 문구를 바꿔 놨다. 이번에는 꿈과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자야지.
"엄마, 감기 걸리면 어느 병원에 가야 돼?"
"이비인후과에 가야지"
"이비인후과는 어디가 아플 때 가는 거야?"

이비인후과는 한자로 耳鼻咽喉科라고 쓴다. 말 그대로 귀(耳, 귀 이), 코(鼻, 코 비), 목구멍(咽喉, 인후)을 다루는 과(科)이다. 중국 사람에게는 아주 직관적이어서 어린이도 알아들을만한 이름인데 (중국어에서는 한 글자를 빼서 이비후과라고 한다) 우리말에서는 한자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이름이다.

의학 용어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비인후과가 귀코목구멍과였다면 이름만 보고도 어디가 아플 때 가는 병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이비인후과를 otorhinolaryngology 라는 어려운 단어 대신에 ear, nose and throat (ENT)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못 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위의 대화가 이렇게 바뀌지 않을까?

"엄마, 감기 걸리면 어느 병원에 가야 돼?"
"감기 걸리면 콧물 나고 목이 아프지?"
"응"
"그러면 귀코목구멍과 가야지."
"아, 그렇구나!"

대학교 기숙사 주위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그 고양이들을 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을 따서 xx캣이라고 불렀다. 고양이들의 주식은 학생들이 먹고 남긴 배달 음식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종종 치킨, 피자, 족발, 두루치기 등의 다양한 음식을 시켜 먹곤 했다. 학생들이 하도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먹으니 학교에서 아예 기숙사 건물 입구에 그릇 반납용 선반을 설치해 주었는데, 학생들이 그 곳에 배달 음식 그릇을 가져다 놓고 가면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잔반을 먹곤 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겨울학기 수업은 듣는 학생이 적어서 학교가 휑했다. 학교가 있던 곳은 평소에 눈이 거의 안 오는 지역이었는데 그 날 따라 눈이 엄청나게 왔었다. 쌓인 눈을 밟으며 밤에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기숙사 입구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학교 고양이들은 학생들을 보면 멀찌감치서부터 도망가곤 했는데 얘네들은 희한하게도 나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기숙사 입구에 다 가서 보니 고양이들이 비어있는 배달음식 퇴식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라 학생들이 다 집에 가고 나니 잔반이 주식인 고양이들이 먹을 게 없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눈이 와서 추워서 그랬는지 그 고양이들은 눈이 쌓이지 않은 기숙사 처마 밑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못 먹어서 그랬는지 학기중과 비교하면 매우 홀쭉해진 모습이었다.

카드키를 찍고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자꾸 고양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하며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고민을 하다가 학교 매점에 가서 천하장사 소시지를 샀다. 매점까지 갔다 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도 고양이들은 기숙사 입구에 그대로 있었다. 천하장사를 까서 조금 잘라서 던져줬더니 허겁지겁 먹었다. 한 조각 또 던져줬더니 여전히 잘 먹었다. 이번에는 천하장사를 길게 까서 손에 잡고 내밀어 봤더니 가까이 와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원래는 고양이에게 천하장사를 하나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더 줘야 했다. 두 개째가 지나고 세 개째가 되자 배가 불렀는지 잘 안 받아먹길래 나중에 먹으라고 남은 천하장사를 다 던져주고 방으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생 고양이에게 음식을 줘 본 경험이다.

주인 없는 야생 고양이를 일컫는 표준어는 도둑고양이다. 애묘인들 중에는 도둑고양이 대신 길고양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도둑고양이라는 말이 싫지 않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고양이들은 귀여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가기 때문에 도둑고양이라고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녀석들은 내가 먹으려던 천하장사까지 자기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도둑이 맞다.

옛날 사진을 뒤져보니 그 때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흰 색 바탕에 검은 색 얼룩 무늬가 있던 고양이. 고양이들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아마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인터넷에 보면 고양이한테 잘 해 줬더니 고양이가 쥐나 벌레를 선물로 잡아왔다는 이야기도 많던데 저 고양이들은 내 천하장사를 다 먹어 놓고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입을 싹 닦아 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웃으며 옛날을 추억하게 해 줬으니 이 녀석들은 이미 나한테 천하장사보다 훨씬 큰 보답을 해 준 셈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복덕방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복덕방의 업무는 부동산 매매 중개이지만 보통 복덕방이라고 하면 낡은 가죽 소파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둘러 앉으셔서 장기를 두시면서 짜장면을 시켜 드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복덕방은 그렇게 동네 사람들이 무료할 때 모여서 몇 시간씩 시덥잖은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곤 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쯤 부터인가, 공인중개사라는 말이 복덕방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 부동산 매매라는 업무의 본질은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에는 낡은 가죽 소파와 장기판 대신 회색 합성 수지로 코팅된 합판 책상과 펜티엄 컴퓨터, 육중한 CRT 모니터가 있었다. 누런 색 백열등 대신 눈이 쨍한 형광등이 있었고 짜장면 배달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복덕방(福德房)은 복(福)과 덕(德)이 있는 방(房)이라는 뜻이다. 어감 때문에 구식처럼 보여서 그렇지 사실 뜻이 참 좋은 단어이다. 반면 공인중개사라는 단어에서는 공인(公認)된 중개사(仲介士)라는 뜻 말고는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는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만 어른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 같은 틀에서 볼 때 나는 복덕방이라는 성숙한 단어가 공인중개사라는 유아기적 단어로 퇴행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의 중심이 될 궁궐을 지은 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궁궐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의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 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뜻도 좋으면서 동시에 유교를 나라의 기반으로 하겠다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이름이다. 이처럼 1395년,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 나라의 중요한 건물 이름을 붙일 때에 적어도 고전 한 수는 읆을 줄 알았고 비유와 상징을 사용할 줄 알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사는 곳의 이름은 청와대이다. 청와대(靑瓦臺)는 푸른(靑) 기와(瓦) 집(臺)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써 놓으니까 괜히 뭔가 있어보여서 그렇지, 행인이 길을 가다가 "와 저 집은 지붕이 파랗네" 라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이름이다. 깊은 뜻이나 비유나 상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엮어보려면 유물론하고나 엮일 수 있으려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어휘가 고급스러워지는데 어째 우리말은 요즘 점점 어려지는 것 같다. 복덕방과 공인중개사, 경복궁과 청와대의 차이가 그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제쯤 500년 전으로 성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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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규칙적이지 말자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가 펴는 작업을 반복한다고 생각해 보자. 매번 종이 끝을 정확히 맞추어서 접었다 펴면 모양은 깔끔하겠지만 접힌 부분이 쉬 닳아서 곧 찢어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종이를 접을 때에 끝을 대충, 적당히만 맞추면 모양은 덜 예쁠지 몰라도 접히는 부분이 분산되어서 종이가 오랫동안 닳지 않을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규칙적인 생활은 좋은 것이지만 너무 칼같이 생활하다 보면 득보다 실이 많아지는 순간이 온다. 내가 규칙적으로 살아야지, 규칙이 나를 살기 시작하면 몸에든 마음에든 무리가 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규칙적으로 살되 가끔씩 규칙을 깸으로써 규칙에게 내가 규칙의 주인이지 규칙이 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규칙적인 삶은 절대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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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기와 플러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가장 낯설었던 일은 수학 선생님이 +를 더하기가 아니라 플러스라고 읽었던 일이다. 선생님 뿐만 아니라 학원에서 속칭 "선행학습"을 해 온 아이들은 다들 더하기 대신 플러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빼기도 마이너스가 되어 있었다. 어색했고 이상했다. 그렇게 일 더하기 일도 아니고 원 플러스 원도 아닌 일 플러스 일이라는 이상한 언어로 수학을 배웠다. 더하기는 초등학생이나 쓰는 용어이니 중학생이 되었으면 플러스 정도는 써 주어야 한다는 이상한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곱하기와 나누기는 타임즈, 디바이디드 바이라고 안 읽었나 싶다.

안 중요한 학문이 어디 있겠냐마는 수학은 정말 중요한 학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학문일수록 어휘의 우리말화가 중요하다. 잘 만들어진, 혹은 잘 번역된 전공 용어는 개념을 쉽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다행히 고등학교 수준 까지의 수학 용어는 우리말로 대부분 잘 옮겨진 편이다. 경우의 수, 제곱, 사다리꼴, 꼭짓점, 원뿔곡선 등 좋은 우리말 용어가 많다.

의아한 점은 대학교에 가면 다시 사람들이 영어 용어를 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마치 중학교에 가자 더하기를 플러스라고 했던 것 처럼 대학에 가면 행렬을 매트릭스라고 하게 된다. 왜 그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새로운 개념을 원서를 통해서 배우다 보니 우리말 용어를 쓰고 싶어도 우리말 용어가 없다고. 그렇게 따지면 자연수, 실수, 정수도 원래는 없던 말이었다. 아니, 인류 전체에게 그런 개념 자체가 없던 적도 있었다.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서 붙여주면 될 일이다.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 나에게 와서 꽃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수학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이공계 전공 과목이 그렇다. "이콜라이에서 진 뿔려서 젤러닝 한 다음에 마말리안 쎌에 넣었습니다" 같은 말이 나온다. 대장균에서 유전자 증폭시켜서 전기영동 한 후에 포유류 세포에 넣었다고 하면 될 것을.

각 전문 분야에서 우리말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작은 변화라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예전에 중고등학생 수학 과외를 할 때면 꼭 더하기, 빼기라는 말을 썼다. 헷갈릴 일이 없는 상황이면 세모, 네모도 썼다. 단 한 번도 학부모들에게 그에 대한 불만을 들은 적이 없고 그렇게 일 년 이상 과외를 했던 학생도 있는 걸 보면 적어도 더하기 빼기 세모 네모를 썼다고 해서 학생들 수학 실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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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리말의 '그'는 남자도 여자도 다 될 수 있는, 성별과 관계가 없는 단어입니다. 성별을 확실히 하고 싶으면 '그 남자', '그 여자' 같이 쓰면 됩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만화 제목에도 "그 남자 그 여자"라는 표현이 나오고, 아직도 '그'의 반말형인 '걔'에는 성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자를 '그'로, 여자를 '그녀'로 쓰는 글이 많이 보입니다. 아마 영어의 he와 she를 번역하던 사람들이 이런 용법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문어체에서만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요즘은 드라마 등에서 구어체로까지 사용이 됩니다.

영어는 무조건 성별을 밝혀야 하는 언어이지만 한국어는 성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언어입니다. 눈사람만 해도 우리말에서는 눈 + 사람이지만 영어에서는 snow + man, 눈 남자가 됩니다. 이렇게 man이 남자도 되고 사람도 되는 영어의 특징이 반지의 제왕 영화판에 잘 나옵니다. "그 어떤 사람(man)도 나를 죽일 수 없다!"라고 괴물(나즈굴)이 말하자 공주(에오윈)가 "나는 남자(man)가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괴물을 베어 버립니다.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되는 대사입니다. 한국어의 '사람'이라는 말은 남녀를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영어는 이 성별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불특정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he라고 쓰나 she라고 쓰나 충분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he or she나 s/he라고 쓰면 글이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오죽하면 성별에 상관없는 ze라는 단어를 만들자는 말까지 나올까요.

애초에 한국어의 '그'는 이런 성별 문제가 없는 편리한 단어인데 번역가들이 이 편리한 단어를 망쳐버렸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남자는 '그 남자', 여자는 '그 여자', 그리고 성별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은 '그'라고 쓰는 용법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영어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을 지칭하려고 새로운 단어까지 만드는데, 왜 우리는 이미 있는 좋은 '그'라는 단어를 자꾸 반쪽으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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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면 달은 내가 친근하게, 혹은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해는 오래 쳐다볼 수 없지만 달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쳐다볼 수 있다. 무엇이 됐건간에 하나를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어디에서부턴가 슬그머니 조심스럽게 나타나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게 마련인데 달은 거기에 추가로 지루하지 않도록 매일 조금씩 모양과 시간까지 바꾸어 주니, 옛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달을 노래해 온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달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달은 밤에 뜬다. 밤은 어둡다. 사람은 어두우면 쉬 감상적이 된다. 그래서 달이 나오는 시나 노래에는 대체로 감성이 풍부히 녹아 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밤 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라는 박두진 시인의 시 '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해를 노래하는 노래는 씩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달을 보는 사람은 먼 옛날 백제의 누군가가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내가논대 졈그랄 셰라 (달님, 높이 돋아 주세요.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라고 노래했던 그 때나 지금이나 서정적이 되고 만다. 그 이순신 장군마저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는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끓나니"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달과 사람 마음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잘 포착해낸 노래가 달빛이 자기 마음을 대신 표현해준다는 등려군의 대표곡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보름달을 봤다. 보는 순간 '아, 다음 보름달은 추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5년 전 추석 때, 홍콩 생활이 가까스로 1년이 되었던 그 때에는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고독을 마음에 품었다(異國の空見つめて孤獨を抱きしめた)던 엑스 재팬의 노래 가사가 자꾸 입에서 맴돌았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고, 강산이 절반은 바뀌었고 나한테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보름달을 지나고 하루하루 사그러드는 달이 참 친근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보아는 달을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이라고 노래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작아지는 달이 슬프지 않다. 사실 달 자체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은 그저 그 곳에 있을 뿐이고, 그 달을 보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거울처럼 달에 비추어 보는 것일 뿐이다. 달은 슬픈 사람에게는 슬프게, 기쁜 사람에게는 기쁘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달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름에부터 달이 들어가 있는 신라의 유적지 월성 옆에는 월지, 달 연못이라는 연못이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그곳에서 주령구라는 신라 시대의 14면체 주사위가 발견됐다. 술자리 벌칙용 주사위인데 벌칙 중 하나가 월경일곡(月鏡一曲), '달 거울이라는 제목의 노래 한 곡 부르기' 이다. 가사 내용은 모르겠으나 달이 자기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준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내 맘대로 짐작해본다. 600년대에 경주에 살던 신라 사람이나 2000년대에 홍콩에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나 달을 보면서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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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시험에 서술형 문제가 있었다. 서로 다른 답 두 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둘 중 뭐가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두 내용 다 답지에 써 냈던 것 같다. 시험이 끝난 후 우연히 교수님께 여쭤 볼 기회가 생겨서 여쭤보니 내가 쓴 두 답 중 하나가 맞는 답이기는 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내게 맞는 답만 써야지, 상관없는 내용까지도 답지에 써 놓으면 안 된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면 답지에 자기가 아는 것을 다 덤프해버리면 만점 받게?"


전산학에서 '메모리 덤프', 줄여서 '덤프'라고 하면 어느 한 순간에 메모리에 있는 내용을 가공하거나 후처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프로그램 실행 중 문제가 있을 때에 메모리 덤프를 하게 된다. 메모리 덤프에는 문제가 일어난 그 순간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기에 그것을 잘 분석하기만 하면 문제의 원인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 속에서 딱 필요한 내용만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메모리 덤프의 장점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유용한 정보가 수많은 의미없는 정보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덤프는 정보 분석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이다. 대학교 2학년 때 그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시험 답안지에는 딱 답만 써야지, 답과 답이 아닌 것을 함께 써 버리면 안 된다. 만약에 내가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서 서술형 문제에 대한 답으로 써 냈다면 내가 쓴 내용 중에 분명 문제의 답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틀린 답이 될 것이다. "헌법 제 1조 1항을 쓰시오" 라는 시험문제에 헌법, 민법, 상법 전문을 수천 페이지에 걸쳐 다 써서 낸다면 그것은 절대로 문제를 잘 푼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덤프이다.


신문을 보면,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녀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덤프'시키는 부모가 많은 것 같다. 모국어도 잘 못하는 아이를 외국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악기 과외를 시키고 예닐곱 과목에 대해 각각 과외선생을 붙이며 방학이 되면 학원 투어를 시키는 학부모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쓰면 쓸수록 손만 아프다.


그런 부모들 중에는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내 아이에게 이 과목 공부를 안 시켰다가 시험을 망치면 어쩌지? 그래서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어쩌지?' 이런 마음 때문에 성장기 아이를 하루에 대여섯 시간도 못 자게 하면서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과외를 시킨다. '덤프'시키는 것, 즉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모든 학원과 과외를 제공했어. 그러니 설령 대학에 잘 못 가도 최소한 내 책임은 없어. 나는 할 것을 다 했어.' 비유를 해 보자면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약국에 있는 약을 통째로 다 사 와서 아이에게 준 뒤에 '이 중에는 분명 너에게 필요한 약이 있어. 나는 정말 큰 돈과 시간을 써서 너에게 이 수많은 약을 가져다 주었어. 난 헌신적인 부모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무작정 쏟아부어주고 나면, 자식에게 무엇이 좋은 지 몰라서 남들이 하는 대로 온갖 좋은 것이라는 것은 다 들이붓고 나면, 그렇게 '덤프'하고 나면 더이상 해 줄 것이 없기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렇게 해 놓고서 스스로를 훌륭한 부모, 헌신적인 부모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과 열정과 돈을 펑펑 써 가며 아이를 망친다.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은 아이에게 10인용 중국집 풀코스 요리를 시켜주고 좋은 것이니 남기지 말고 꼭 다 먹으라고 한 뒤에 스스로의 헌신에 흐뭇해하는 꼴이다.


'덤프'하지 말자. 덤프는 정보 분석의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이다. 자녀 교육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수많은 방향 중에서 무엇이 내 자녀에게 좋은 것인지를 판단해주는 능력이지, 온갖 방향을 다 자녀에게 욱여넣는 것이 아니다. 아이 머리는 스펀지와 같아서 가르치는 내용을 다 흡수한다는 학원 상담 선생 말만 믿었다가는 물을 함빡 머금은 스펀지를 살짝 쥐어짜기만 해도 물이 다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물을 스펀지에 쏟아 붓느라 허공에 날린 돈과 시간과 아이의 건강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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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배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착하면서 동시에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려다가도 '내가 이렇게 했다가 상대방이 상처를 받으면 어쩌지? 저렇게 했다가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면 어쩌지? 나는 좋은 의도로 하더라도 상대방은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쉬 지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삶 전반에 걸쳐 주눅이 들게 되고 소극적이 된다.

이것은 완벽주의이다. 완벽주의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소심하게 만든다. 완벽주의는 실패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있는 도전을 하느니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래서 좋은 의도로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려다가도 만에 하나 그 사람이 싫어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행동을 접는 완벽주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안타를 맞을까봐 아예 공을 안 던지는 투수, 실점을 할까봐 아예 경기에 안 나가는 골키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문제를 푸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하지 못하기에 나 역시 완벽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이 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뭐'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잘 안 된다. 완벽주의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 있다. 완벽함의 기준을 '실패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늘리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위의 스포츠 예를 이어서 말하자면 투수가 '안타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삼진을 잡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고 골키퍼가 '실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방을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잘해야 본전인 상황이고 후자는 밑져야 본전인 상황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이 글도 그런 마음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이번 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참 많이 있다. 글 흐름도 부자연스럽고 마무리도 어색하다. 하지만 그렇게 '흠이 없는 글을 쓰기'에 집중하는 대신 '좋은 점이 있는 글을 쓰기'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글이라고 해도 그 속에 좋은 부분이 있다면 그 글은 충분히 가치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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