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 코드 실행 시간 측정하기 (System.currentTimeMillis())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코드 특정 부분의 실행 시간을 측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에 아래와 같이 System.currentTimeMillis() 함수를 사용하면 밀리초 단위로 시간을 잴 수 있습니다.

System.currentTimeMillis() 의 반환 변수 형식은 long 입니다.


long 시작시간 = System.currentTimeMillis();

// 여기서 원하는 작업을 해 줍니다.

long 끝시간 = System.currentTimeMillis();

long 걸린시간 = 끝시간 - 시작시간;

System.out.println("걸린 시간: " + 걸린시간 + " 밀리초");


아래 명령어로 리눅스 종류와 버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grep . /etc/*-release


제가 사용하는 서버에서는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오네요.


/etc/centos-release:CentOS Linux release 7.4.1708 (Core) 

/etc/os-release:NAME="CentOS Linux"

/etc/os-release:VERSION="7 (Core)"

/etc/os-release:ID="centos"

/etc/os-release:ID_LIKE="rhel fedora"

/etc/os-release:VERSION_ID="7"

/etc/os-release:PRETTY_NAME="CentOS Linux 7 (Core)"

/etc/os-release:ANSI_COLOR="0;31"

/etc/os-release:CPE_NAME="cpe:/o:centos:centos:7"

/etc/os-release:HOME_URL="https://www.centos.org/"

/etc/os-release:BUG_REPORT_URL="https://bugs.centos.org/"

/etc/os-release:CENTOS_MANTISBT_PROJECT="CentOS-7"

/etc/os-release:CENTOS_MANTISBT_PROJECT_VERSION="7"

/etc/os-release:REDHAT_SUPPORT_PRODUCT="centos"

/etc/os-release:REDHAT_SUPPORT_PRODUCT_VERSION="7"

/etc/redhat-release:CentOS Linux release 7.4.1708 (Core) 

/etc/system-release:CentOS Linux release 7.4.1708 (Core)

그래들 파일에 다음 코드를 추가한 뒤 실행해주면 build/libs 에 opencv-android.jar 파일이 생성됩니다.


task jar(type: Jar) {

    from 'build/intermediates/classes/release/'

    archiveName 'opencv-android.jar'

}

[자바] 제곱 속도 - 직접 만든 제곱 함수가 Math.pow() 보다 빠를 때도 있어요


* 1.0의 제곱을 20억 번 할 경우 Math.pow()가 직접 만든 제곱 함수보다 세 배 느렸습니다.


* 제곱 횟수를 훨씬 늘리면 시간 차이가 줄어들던데, 아마 JIT 컴파일 때문이 아닐까 추측만 해 보았습니다.


* 실험 결과와 코드는 아래와 같습니다.





걸린 시간 (Math.pow 함수, 20억 회): 6 ms

걸린 시간 (직접 만든 제곱, 20억 회): 2 ms




public class 제곱속도측정 {


  public static double 직접만든제곱(double 숫자) {

    return 숫자*숫자;

  }


  public static void main(String[] args) {

    long 시작시간1 = System.currentTimeMillis();

    for(int i=0; i<2000000000; ++i) {

      Math.pow(1.0, 2);

    }

    long 끝시간1 = System.currentTimeMillis();

    System.out.println("걸린 시간 (Math.pow 함수, 20억 회): " + (끝시간1-시작시간1) + " ms");


    long 시작시간2 = System.currentTimeMillis();

    for(int i=0; i<2000000000; ++i) {

      직접만든제곱(1.0);

    }

    long 끝시간2 = System.currentTimeMillis();

    System.out.println("걸린 시간 (직접 만든 제곱, 20억 회): " + (끝시간2-시작시간2) + " ms");

  }


}







리눅스에서 프로그램을 돌려 놓고 한참 뒤에 보면 화면에 Killed 라는 글만 떠 있고 프로세스가 죽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dmesg | grep -E -i -B100 'killed process'

라고 치면 프로세스가 강제 종료될 때의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대부분 Out of memory가 원인이었습니다.


(참고한 자료: https://stackoverflow.com/questions/726690/who-killed-my-process-and-why)

원래 우리말의 '그'는 남자도 여자도 다 될 수 있는, 성별과 관계가 없는 단어입니다. 성별을 확실히 하고 싶으면 '그 남자', '그 여자' 같이 쓰면 됩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만화 제목에도 "그 남자 그 여자"라는 표현이 나오고, 아직도 '그'의 반말형인 '걔'에는 성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자를 '그'로, 여자를 '그녀'로 쓰는 글이 많이 보입니다. 아마 영어의 he와 she를 번역하던 사람들이 이런 용법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문어체에서만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요즘은 드라마 등에서 구어체로까지 사용이 됩니다.

영어는 무조건 성별을 밝혀야 하는 언어이지만 한국어는 성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언어입니다. 눈사람만 해도 우리말에서는 눈 + 사람이지만 영어에서는 snow + man, 눈 남자가 됩니다. 이렇게 man이 남자도 되고 사람도 되는 영어의 특징이 반지의 제왕 영화판에 잘 나옵니다. "그 어떤 사람(man)도 나를 죽일 수 없다!"라고 괴물(나즈굴)이 말하자 공주(에오윈)가 "나는 남자(man)가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괴물을 베어 버립니다.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되는 대사입니다. 한국어의 '사람'이라는 말은 남녀를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영어는 이 성별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불특정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he라고 쓰나 she라고 쓰나 충분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he or she나 s/he라고 쓰면 글이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오죽하면 성별에 상관없는 ze라는 단어를 만들자는 말까지 나올까요.

애초에 한국어의 '그'는 이런 성별 문제가 없는 편리한 단어인데 번역가들이 이 편리한 단어를 망쳐버렸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남자는 '그 남자', 여자는 '그 여자', 그리고 성별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은 '그'라고 쓰는 용법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영어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을 지칭하려고 새로운 단어까지 만드는데, 왜 우리는 이미 있는 좋은 '그'라는 단어를 자꾸 반쪽으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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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면 달은 내가 친근하게, 혹은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해는 오래 쳐다볼 수 없지만 달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쳐다볼 수 있다. 무엇이 됐건간에 하나를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어디에서부턴가 슬그머니 조심스럽게 나타나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게 마련인데 달은 거기에 추가로 지루하지 않도록 매일 조금씩 모양과 시간까지 바꾸어 주니, 옛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달을 노래해 온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달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달은 밤에 뜬다. 밤은 어둡다. 사람은 어두우면 쉬 감상적이 된다. 그래서 달이 나오는 시나 노래에는 대체로 감성이 풍부히 녹아 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밤 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라는 박두진 시인의 시 '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해를 노래하는 노래는 씩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달을 보는 사람은 먼 옛날 백제의 누군가가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내가논대 졈그랄 셰라 (달님, 높이 돋아 주세요.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라고 노래했던 그 때나 지금이나 서정적이 되고 만다. 그 이순신 장군마저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는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끓나니"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달과 사람 마음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잘 포착해낸 노래가 달빛이 자기 마음을 대신 표현해준다는 등려군의 대표곡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보름달을 봤다. 보는 순간 '아, 다음 보름달은 추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5년 전 추석 때, 홍콩 생활이 가까스로 1년이 되었던 그 때에는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고독을 마음에 품었다(異國の空見つめて孤獨を抱きしめた)던 엑스 재팬의 노래 가사가 자꾸 입에서 맴돌았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고, 강산이 절반은 바뀌었고 나한테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보름달을 지나고 하루하루 사그러드는 달이 참 친근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보아는 달을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이라고 노래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작아지는 달이 슬프지 않다. 사실 달 자체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은 그저 그 곳에 있을 뿐이고, 그 달을 보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거울처럼 달에 비추어 보는 것일 뿐이다. 달은 슬픈 사람에게는 슬프게, 기쁜 사람에게는 기쁘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달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름에부터 달이 들어가 있는 신라의 유적지 월성 옆에는 월지, 달 연못이라는 연못이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그곳에서 주령구라는 신라 시대의 14면체 주사위가 발견됐다. 술자리 벌칙용 주사위인데 벌칙 중 하나가 월경일곡(月鏡一曲), '달 거울이라는 제목의 노래 한 곡 부르기' 이다. 가사 내용은 모르겠으나 달이 자기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준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내 맘대로 짐작해본다. 600년대에 경주에 살던 신라 사람이나 2000년대에 홍콩에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나 달을 보면서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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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시험에 서술형 문제가 있었다. 서로 다른 답 두 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둘 중 뭐가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두 내용 다 답지에 써 냈던 것 같다. 시험이 끝난 후 우연히 교수님께 여쭤 볼 기회가 생겨서 여쭤보니 내가 쓴 두 답 중 하나가 맞는 답이기는 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내게 맞는 답만 써야지, 상관없는 내용까지도 답지에 써 놓으면 안 된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면 답지에 자기가 아는 것을 다 덤프해버리면 만점 받게?"


전산학에서 '메모리 덤프', 줄여서 '덤프'라고 하면 어느 한 순간에 메모리에 있는 내용을 가공하거나 후처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프로그램 실행 중 문제가 있을 때에 메모리 덤프를 하게 된다. 메모리 덤프에는 문제가 일어난 그 순간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기에 그것을 잘 분석하기만 하면 문제의 원인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 속에서 딱 필요한 내용만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메모리 덤프의 장점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유용한 정보가 수많은 의미없는 정보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덤프는 정보 분석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이다. 대학교 2학년 때 그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시험 답안지에는 딱 답만 써야지, 답과 답이 아닌 것을 함께 써 버리면 안 된다. 만약에 내가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서 서술형 문제에 대한 답으로 써 냈다면 내가 쓴 내용 중에 분명 문제의 답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틀린 답이 될 것이다. "헌법 제 1조 1항을 쓰시오" 라는 시험문제에 헌법, 민법, 상법 전문을 수천 페이지에 걸쳐 다 써서 낸다면 그것은 절대로 문제를 잘 푼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덤프이다.


신문을 보면,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녀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덤프'시키는 부모가 많은 것 같다. 모국어도 잘 못하는 아이를 외국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악기 과외를 시키고 예닐곱 과목에 대해 각각 과외선생을 붙이며 방학이 되면 학원 투어를 시키는 학부모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쓰면 쓸수록 손만 아프다.


그런 부모들 중에는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내 아이에게 이 과목 공부를 안 시켰다가 시험을 망치면 어쩌지? 그래서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어쩌지?' 이런 마음 때문에 성장기 아이를 하루에 대여섯 시간도 못 자게 하면서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과외를 시킨다. '덤프'시키는 것, 즉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모든 학원과 과외를 제공했어. 그러니 설령 대학에 잘 못 가도 최소한 내 책임은 없어. 나는 할 것을 다 했어.' 비유를 해 보자면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약국에 있는 약을 통째로 다 사 와서 아이에게 준 뒤에 '이 중에는 분명 너에게 필요한 약이 있어. 나는 정말 큰 돈과 시간을 써서 너에게 이 수많은 약을 가져다 주었어. 난 헌신적인 부모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무작정 쏟아부어주고 나면, 자식에게 무엇이 좋은 지 몰라서 남들이 하는 대로 온갖 좋은 것이라는 것은 다 들이붓고 나면, 그렇게 '덤프'하고 나면 더이상 해 줄 것이 없기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렇게 해 놓고서 스스로를 훌륭한 부모, 헌신적인 부모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과 열정과 돈을 펑펑 써 가며 아이를 망친다.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은 아이에게 10인용 중국집 풀코스 요리를 시켜주고 좋은 것이니 남기지 말고 꼭 다 먹으라고 한 뒤에 스스로의 헌신에 흐뭇해하는 꼴이다.


'덤프'하지 말자. 덤프는 정보 분석의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이다. 자녀 교육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수많은 방향 중에서 무엇이 내 자녀에게 좋은 것인지를 판단해주는 능력이지, 온갖 방향을 다 자녀에게 욱여넣는 것이 아니다. 아이 머리는 스펀지와 같아서 가르치는 내용을 다 흡수한다는 학원 상담 선생 말만 믿었다가는 물을 함빡 머금은 스펀지를 살짝 쥐어짜기만 해도 물이 다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물을 스펀지에 쏟아 붓느라 허공에 날린 돈과 시간과 아이의 건강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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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배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착하면서 동시에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려다가도 '내가 이렇게 했다가 상대방이 상처를 받으면 어쩌지? 저렇게 했다가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면 어쩌지? 나는 좋은 의도로 하더라도 상대방은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쉬 지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삶 전반에 걸쳐 주눅이 들게 되고 소극적이 된다.

이것은 완벽주의이다. 완벽주의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소심하게 만든다. 완벽주의는 실패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있는 도전을 하느니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래서 좋은 의도로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려다가도 만에 하나 그 사람이 싫어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행동을 접는 완벽주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안타를 맞을까봐 아예 공을 안 던지는 투수, 실점을 할까봐 아예 경기에 안 나가는 골키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문제를 푸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하지 못하기에 나 역시 완벽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이 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뭐'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잘 안 된다. 완벽주의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 있다. 완벽함의 기준을 '실패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늘리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위의 스포츠 예를 이어서 말하자면 투수가 '안타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삼진을 잡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고 골키퍼가 '실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방을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잘해야 본전인 상황이고 후자는 밑져야 본전인 상황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이 글도 그런 마음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이번 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참 많이 있다. 글 흐름도 부자연스럽고 마무리도 어색하다. 하지만 그렇게 '흠이 없는 글을 쓰기'에 집중하는 대신 '좋은 점이 있는 글을 쓰기'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글이라고 해도 그 속에 좋은 부분이 있다면 그 글은 충분히 가치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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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이 다 다르듯 구미권의 나라들도 다 다르니 그네들을 서양이라고 퉁치려면 참 무리가 따르겠다 싶지만, 자기들끼리 유럽 연합이니 나토니 하는 것을 만들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서양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중일 3국이야 좋으나 싫으나 역사로 엮여 있는 나라들이고, 동남아 국가들과도 아세안 플러스 한중일 해서 꽤 가깝게 지내니 동양이라는 어정쩡한 말도 아주 못 쓸 말은 아닐 것이다. 하여간 지금 쓰려는 것은 논문이 아니라 일요일 오후의 끄적임이기에 이렇게 모호한 용어를 있는 그대로 모호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원래 모호한 것에 대해 말해야 어줍잖은 지식으로 썰을 풀고 약도 팔 수 있는 법이다.

서양의 숫자는 7이다. 일주일은 월화수목금토일 7일이다. 계이름도 도레미파솔라시 7개다. 카지노에서는 777이 나와야 대박이다. 무지개는 서양에서도 나라에 따라 5개, 6개라고 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빨주노초파남보 7색이다. 백설공주 옆에는 여섯도 여덟도 아닌 일곱 난장이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7이 좋은 숫자이다 보니 7에서 하나가 빠진 6은 나쁜 숫자다. 그래서 666이 악마의 수가 되지 않았나.

반면 동양의 숫자는 5다. 계이름이 궁상각치우든 중임무황태든 하여튼 5개다. 윷놀이에도 도개걸윷모 5개의 경우가 있다. 얼굴을 찌푸려도 오만상을 찌푸리지 육만상이나 칠만상을 찌푸리지는 않는다. 화투를 쳐도 새를 다섯 마리 모으면 어원이 小鳥(kotori) 이든 五鳥(gotori) 이든 어쨌든간에 고도리가 돼서 좋다. 무지개도 오색무지개라고는 해도 칠색무지개라고는 안 한다. 5가 이렇게 좋은 수인데 방위는 동서남북 네 개 밖에 없으니 어쩌지 하다가 어거지로 중앙이라는 개념을 끼워넣어서 어쨌든 오방을 만들어서 오방색을 정한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멋진 산들이 많은데도 꼭 다섯 개씩만 모아서 오악이라고 한다. 오곡밥은 있어도 육곡밥, 칠곡밥은 없다. 하다못해 독수리도 오형제여야 했고 후레쉬맨에서도 옛날 옛날 먼 옛날에 하필이면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저 멀리로 사라졌어야 했다. 미국에서 만든 파워 레인저도 다섯 명이지만 그건 미국에서 일본 전대물을 수입해가서 그렇다.

사족을 달자면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가지 힘이 하나로 모인 캡틴 플래닛은 숫자가 5이지만 굉장히 서양적인 만화인데, 왜냐하면 이 만화의 5는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다가 마음을 덧붙여서 나온 숫자라서 그렇다. 비슷한 개념이 적용된 것으로 프랑스 감독 뤽 베송의 영화 제 5원소가 있다.

다시 돌아와서, 5와 7 두 숫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서양의 7은 기독교에서 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7일동안 만드셨기에 7이 좋은 숫자이다. 동양의 5는 오행사상에서 왔다. 오행에는 목화토금수 다섯 개념이 있다. 나무, 불, 흙, 쇠, 물이 서로 물고 물린다. 행성 이름도 얘네들을 따서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다. 그래서 뒤쪽 행성들은 붙일 이름이 마땅치 않아 서양에서 쓰는 그리스 신 이름을 번역하는 바람에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같은 이질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근대에 서양 달력을 쓰게 됐는데 일주일이 7일이니 목화토금수를 다 가져다 붙여도 이틀이 비어서 해와 달까지 끌어들여 일요일과 월요일을 만들어야 했다.

요즘 우리는 오색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으로 부르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동양의 5색 무지개가 서양에서 7색이려면 몇몇 색들이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어의 '푸른색'이 영어에서는 파란색과 초록색 두 개로 갈라진다. 우리가 신호등의 초록색 불을 보고 "야 파란불이다 빨리 건너자" 하는 게 다 그런 흔적이다.

동양 전통이 5, 서양 전통이 7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숫자는 뭘까.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 5나 7중 하나만 고집할수는 없다. 5만 고집하기엔 7이 우리 삶 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 반대로 5를 다 버리고 7로 갈아타자고 하는 것은 우리 문화 속에 5가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결국 두 숫자 중 무엇을 고르더라도 포기한 것 때문에 잃는 것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5와 7을 평균내서 6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건 꽝이다. 5 입장에서 보면 6은 쓸데없고 거추장스러운 것 하나를 더 달고 있는 숫자다. 더 심각하게도 7 입장에서 보면 6은 666에서 볼 수 있듯 악마의 숫자다. 6이 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옛말따나 죽도 밥도 아니다. 연예계에서 이런 식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가 국내 인기도 잃고 해외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 얻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이러느니 차라리 5만 하든지 7만 하든지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낫다. 어줍잖은 퓨전 음식을 만드느니 차라리 한식과 양식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좋은 것과 같다.

둘째는 5냐 7이냐라는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5, 7)이라는 이차원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5, 7)이 되면 5한테는 "나는 x축으로 5에요"라고, 7한테는 "나는 y축으로 7이에요"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을 만족스럽게 포함하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방식은 또다른 문화권을 새로 접하더라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차원만 늘리면 되니까.

그런데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해야 (5, 7)이 될 수 있을까.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5와 7 양쪽 모두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잘 알아야 그 다음에 뭘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때문에 영어공부를 하면서도 5때문에 국문학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쇼팽과 베토벤을 들었으면 대금 산조도 좀 들어봐야 하고, 유럽 배낭여행 갔다 왔으면 국내 여행도 다녀봐야 한다. 아무리 내가 속해있는 문화권이라고 해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그 다음으로는 어느 하나도 버리지 말고 둘 다 잘 잡고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양쪽을 잘 알아도 사람이라는 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으로만 쏠리기가 쉽다. 그래서 5로 쏠리면 국수주의, 요즘 인터넷 용어로 국뽕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7로 쏠리면 사대주의자나 자국 혐오자, 요즘 말로 국까가 되게 된다. 양쪽 예 둘다 SNS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게 적었지만 결국 줄이면 지피지기(知彼知己) 네 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5와 7이 전쟁중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자병법을 인용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어쨌든 사실 지피지기(知彼知己)만 보는 것 보다는 다음에 오는 네 글자까지 함께 봐야 더 의미심장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절대로 위태롭지 않다. 이 말대로라면, 반대로 5만 알거나 7만 알면 언젠가는 반드시 위태로운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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