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상상해보자. 콜라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전용 잔을 산다. 콜라 재료의 원산지에 따라 콜라 가격에 차등을 둔다. 여럿이서 콜라를 마실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에게 콜라를 따라 줄 때에는 두 손으로 따라야 하며 잔이 비지 않은 상태에서 콜라를 더 따라주면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숙성 년도에 따라 저급 콜라와 고급 콜라가 구분되고 고급으로 갈 수록 가격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고급 콜라를 마시는 것이 상류 사회의 척도인 양 취급되며 나중에는 콜라를 마시는 것이 정신 수양의 척도로까지 인식되어 콜라도(道)라는 것이 생겨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콜라를 술이나 차로 바꾸면 그 순간 모두 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술과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문화 요소라는 뜻이다. 시선(詩仙), 시를 쓰는 신선이라고까지 불렸던 이태백은 對酒還自傾(대주환자경, "술을 대하니 다시 또 술을 기울이네" 라는 뜻)이라는 시구를 썼고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잠에서 깨려고 잘라버린 눈꺼풀은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술과 차는 이렇게 종교에까지 연결되는 음료인 것이다. 이태백이 시선(詩仙)이라고 불렸던 것과 달마 전설에서 알 수 있듯 도교의 음료는 술이고 불교의 음료는 차다.

술과 차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술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지만 차는 정신을 맑게 한다. 술은 사람을 졸리게 하지만 차는 잠이 확 깨게 한다. 술을 마신 사람은 감정적이 되지만 차를 마신 사람은 이성적이 된다. 그래서 술은 밤의 음료이고 차는 아침의 음료이다. 술과 차라는 이 두 음료가 지금까지 좁게는 한국의, 넓게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두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대표해 왔다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한국에 술도 차도 아닌 새로운 음료가 들어왔다. 잠이 확 깨게 하는 것은 차를 닮았는데 많이 마시면 감정적으로 흥분되게 하는 것은 술을 닮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차의 특성이 있는가 하면 중독되게 만드는 술의 특성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색깔은 차처럼 은은하지도 술처럼 투명하지도 않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이다. 바로 커피다.

커피는 맨 위에서 언급했던 술과 차의 모든 특성을 갖고 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한 전용 잔이 있고 커피 원두의 원산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세련된 문화로 취급되며 다도(茶道)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커피를 만드는 도구들은 단순히 도구를 넘어서 예술의 언저리를 건드리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술이 도교와, 차가 불교와 연결되듯 커피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연결된다. 커피는 한동안 이슬람 문화권의 음료였다. 이슬람권에서는 종교 행사 중에 잘 깨어있기 위한 용도로 커피를 애용했고, 이슬람과 사이가 안 좋았던 유럽에서는 당연히 커피를 싫어해서 악마의 음료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야사에 따르면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커피를 축복한 이후로 기독교권에서도 커피를 널리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임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니 유럽과 한국의 커피 역사는 약 300년 정도 차이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문화의 한 요소이며 종교로까지 이어지는 음료인 커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술과 차가 근대까지의 한국의 두 생활양식을 대표한다는 가설이 맞다면 현대 한국에는 술도 차도 아닌 커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존재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한국의 커피스러운 생활양식이란 뭘까. 머릿속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많은 대답 중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탈진'을 꼽겠다.

커피는 탈진한 사람들이 내일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쓸 때 사용하는 음료다. 대학생들은 시험기간에 밤을 새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똑같이 카페인이 들어있다고 해도 밤을 새기 위해 한밤중에 차를 마시는 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나와서 본인들 표현대로 하자면 '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몇백 밀리리터씩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신다. 그러다가 카페인에 내성이 생겨버린 사람들은 커피를 넘어서서 박카스나 레드불 같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기 시작한다.

오해를 풀기 위해 밝혀두자면 한국에는 커피를 음미하며 즐기는 애호가들이 물론 매우 많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음료를 마시는 전체 인구 중 탈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용도로 그 음료를 마시는 사람의 비율이 술이나 차보다 커피의 경우에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위에 적었듯이 낮의 음료는 차였고 밤의 음료는 술이었다. 낮술이라는 단어가 따로 만들어졌어야 했을 정도로 술은 밤에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는 낮에나 밤에나 다 마실 수 있지만 밤에 차를 마실 때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잘 자기 위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낮에는 잘 깨어 있고 밤에는 잔다는 극히 상식적인 생활 양식이 술과 차에 모두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커피는 그것을 깨 버렸다. 밤에는 자야 하는데 억지로 깨어있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그러니 늦게 자게 되어 다음날에 피곤해지고, 피곤하니 점심 때에 졸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신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모든 것이 경쟁적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모습이다. 지금의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신다. 현대 사회가 한국에서 커피의 양적 팽창은 이루어냈지만 사람들이 커피를 진정 즐기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 1927-1989)라는 미국의 유명 작가가 1982년에 쓴 Down the River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네 문화는 커피와 휘발유 위에서 돌아간다. 첫째 것의 맛이 둘째 것과 같을 때가 종종 있다. (Our culture runs on coffee and gasoline, the first often tasting like the second.)" 이 말은 현대 한국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의 커피는 지금도 종종 휘발유 맛인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카톡 친구 명단을 죽죽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150년을 살것처럼 인생을 계획하고 내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는 프로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지내는 고등학생의 프로필 문구였다. 그때는 '그래 나도 학생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하고 웃으며 지나갔는데 그 후로 자꾸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잊을만 하면 다시 떠올라서 머리가 복잡했다. 보아하니 저절로 없어질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아예 작정하고 진지하게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내일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출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사는 것'의 모범답안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문장을 약간 바꿔 보았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을 살자!' 라고 하면 분석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프로필 문구에 특허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조금 바꾸면 뭐 어때.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은 내일 죽을 확률, 모레 죽을 확률, 글피에 죽을 확률 등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모든 날이 동등하게 중요해지고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지 않게 되니 하루하루를 똑같이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 되겠다. 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매일매일이 다 똑같으니 그냥 일상 속에서 살아가라' 라고 하고 끝내면 뭔가 싱겁고 허전하다. 그래서 더 파고들어 봤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 말 속에 심오한 사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옛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의 유익을 알았다. 라틴어 경구 중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 사람들은 저렇게 경구를 만들어야만 겨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배고파 죽겠네, 웃겨 죽겠네, 졸려 죽겠네 하는 식으로 죽음을 상기해오고 있었다. 뭐뭐 해서 죽겠다는 표현을 부정적이라고 금지시킬 것이 아니다. 금지시켜야 할 것은 똑같은 말인데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 하면 괜히 멋있어 보이고 한국어로 배고파 죽겠다고 하면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그 사대주의다.

하여튼간에 삶은 죽음을 인식할 때에 농밀(濃密)해진다. 몇년 전부터 유행하는 말 중에 욜로(YOLO)라는 것이 있다. You Only Live Once, 직역하면 너는 딱 한번 산다는 말인데 뒷일 생각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질러버리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21세 청년이 트위터에 욜로라고 적어놓고 시속 190km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일이 그 한 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욜로가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뜻이어도 You Will Surely Die, '너는 언젠가 반드시 죽어'라는 문구가 있다면 욜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를 것이다. 적어놓고 나니 저런 문구가 이미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man is destined to die once)" 라는 성경 구절이다.

고등학생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에서 시작된 생각이 메멘토 모리와 욜로를 거쳐서 성경까지 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는 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해결을 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맘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카톡을 켜 봤더니 그 학생이 그새 프로필 문구를 바꿔 놨다. 이번에는 꿈과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자야지.
"엄마, 감기 걸리면 어느 병원에 가야 돼?"
"이비인후과에 가야지"
"이비인후과는 어디가 아플 때 가는 거야?"

이비인후과는 한자로 耳鼻咽喉科라고 쓴다. 말 그대로 귀(耳, 귀 이), 코(鼻, 코 비), 목구멍(咽喉, 인후)을 다루는 과(科)이다. 중국 사람에게는 아주 직관적이어서 어린이도 알아들을만한 이름인데 (중국어에서는 한 글자를 빼서 이비후과라고 한다) 우리말에서는 한자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이름이다.

의학 용어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비인후과가 귀코목구멍과였다면 이름만 보고도 어디가 아플 때 가는 병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이비인후과를 otorhinolaryngology 라는 어려운 단어 대신에 ear, nose and throat (ENT)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못 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위의 대화가 이렇게 바뀌지 않을까?

"엄마, 감기 걸리면 어느 병원에 가야 돼?"
"감기 걸리면 콧물 나고 목이 아프지?"
"응"
"그러면 귀코목구멍과 가야지."
"아, 그렇구나!"

제목은 거창하게 썼는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면서 비전공자이니까 틀려도 창피하지 않다는 뻔뻔한 마음으로 쓴 글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꽃들도" 라는 CCM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花も(하나모)" 라는 일본 찬양인데, 멜로디만 들어보면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듯한 전형적인 일본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매우 일본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다음 가사이다.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花も雲も風も大海も)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奏でよ奏でよイエスを)

 

꽃, 구름, 바람, 넓은 바다 순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다. 꽃보다는 구름이 크고 구름보다는 바람이 더 활동 범위가 넓다. 바람과 바다는 비교하기가 애매한데 그래서인지 굳이 "넓은"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더 크다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이게 왜 특이하냐 하면 일본 문화는 이어령 씨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에서 볼 수 있듯 큰 것을 작게 만드는(응축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해당 책 초반부에 언급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하이쿠를 보자.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

 

동해에서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 게와 눈물 순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령 씨는 이를 두고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꽃들도"의 가사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 전형적인 일본 노래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가사가 다음과 같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불러보면 확실히 일본 정서가 더 잘 느껴진다.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작은 꽃들도

(海も風も雲も小花も)

 

그러면 왜 "꽃들도" 에서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단어들이 배치되었을까? 노래나 시에는 그것을 쓴 사람의 사고방식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에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감정으로 옳은 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면 시인 자신은 그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이다.) 이 노래는 찬양이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6)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있어도 성령 비움이라는 말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작업이고 명상은 내 속을 비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묵상은 있어도 명상은 없다. 채우려면 꽃이 구름과 바람과 큰 바다가 되어야지 바다가 작은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꽃들도"의 가사 순서가 저렇게 일본적이지 않은 순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 왜 마지막이 넓은 땅이 아니라 하필이면 넓은 바다여야 했을까. 다음 구절이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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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유튜브에서 꽤 유명한 기독교 강사가 있다고 해서 동영상을 찾아봤다. 보면서 이 사람은 기독교를 신앙이 아니라 사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신앙인은 우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는 소리를 듣고서 동영상을 꺼 버렸다. 저렇게 교조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성경의 주요 인물들도 슬픔과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다윗이 그랬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시38:6)" 바울도 그랬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결정적으로 예수님도 그러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26:38)"


기독교를 사상으로,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면 저 유명한 유튜브 강사처럼 슬픔에 빠진 사람의 신앙을 무시하게 된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은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그 유명 기독교 강사의 동영상이 여기저기 퍼지고, 그 강사가 방송에도 초대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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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하나 있다고 하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전 국민이 모두 예방접종을 맞으면 아무도 그 병에 걸리지 않는다. 복잡한 일은 전 국민 중 일부가 예방접종을 안 맞을 때에 일어난다.

전 국민 중 딱 한 명만 예방접종을 안 맞는다면 그 사람은 예방접종을 안 맞더라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다 접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병을 옮길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해외 여행을 갔다가 병에 걸려 올 수는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다. 전국에서 두 사람만 예방접종을 안 맞더라도 마찬가지다. 남한 인구 5천만 중에서 자기 빼고 예방접종을 안 맞은 다른 한 사람을 마침 그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에 만나서 병을 옮아 올 확률은 0에 가깝다.

이렇게 예방접종을 안 맞아도 병에 안 걸리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가면 예방접종은 제약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음모론이 돌기 시작한다. "누구네 집 애는 예방접종 안 맞았는데도 건강하게 잘만 살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도 함께다. 곧 그런 사람들이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고 무슨 병에는 숯가루를 탄 물이 좋다는 등의 괴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주위에서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 자기들이 진리 때문에 핍박을 받는 줄로 생각한다. 이쯤 되면 종교의 영역이다. 이런 집단에는 숯가루 먹고서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보이는데 그건 숯가루 먹고 병이 심해진 사람들이 그 카페를 탈퇴해서 그렇다.

자기들끼리만 병에 걸리면 그러든지 말든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자녀들이 피해를 본다는 점에 있다. 전반적인 공중 보건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2005년 부터 필수가 된 수두 예방접종을 아직도 안 맞히고, 수두 걸린 아이를 집으로 초대해서 자기 아이에게 수두를 옮기게 하는 어리석은 부모들이 아직도 있다. 애를 때리는 것만이 아동 학대가 아니다. 이런 게 바로 아동 학대다. 그런 부모들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릴 때 수두에 걸렸던 자식들이 커서 대상포진으로 고생할 때에는 적어도 따뜻한 물에 숯가루를 타서 마시면 바로 낫는다는 류의 소리 대신 빨리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을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대학교 기숙사 주위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그 고양이들을 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을 따서 xx캣이라고 불렀다. 고양이들의 주식은 학생들이 먹고 남긴 배달 음식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종종 치킨, 피자, 족발, 두루치기 등의 다양한 음식을 시켜 먹곤 했다. 학생들이 하도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먹으니 학교에서 아예 기숙사 건물 입구에 그릇 반납용 선반을 설치해 주었는데, 학생들이 그 곳에 배달 음식 그릇을 가져다 놓고 가면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잔반을 먹곤 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겨울학기 수업은 듣는 학생이 적어서 학교가 휑했다. 학교가 있던 곳은 평소에 눈이 거의 안 오는 지역이었는데 그 날 따라 눈이 엄청나게 왔었다. 쌓인 눈을 밟으며 밤에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기숙사 입구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학교 고양이들은 학생들을 보면 멀찌감치서부터 도망가곤 했는데 얘네들은 희한하게도 나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기숙사 입구에 다 가서 보니 고양이들이 비어있는 배달음식 퇴식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라 학생들이 다 집에 가고 나니 잔반이 주식인 고양이들이 먹을 게 없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눈이 와서 추워서 그랬는지 그 고양이들은 눈이 쌓이지 않은 기숙사 처마 밑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못 먹어서 그랬는지 학기중과 비교하면 매우 홀쭉해진 모습이었다.

카드키를 찍고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자꾸 고양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하며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고민을 하다가 학교 매점에 가서 천하장사 소시지를 샀다. 매점까지 갔다 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도 고양이들은 기숙사 입구에 그대로 있었다. 천하장사를 까서 조금 잘라서 던져줬더니 허겁지겁 먹었다. 한 조각 또 던져줬더니 여전히 잘 먹었다. 이번에는 천하장사를 길게 까서 손에 잡고 내밀어 봤더니 가까이 와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원래는 고양이에게 천하장사를 하나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더 줘야 했다. 두 개째가 지나고 세 개째가 되자 배가 불렀는지 잘 안 받아먹길래 나중에 먹으라고 남은 천하장사를 다 던져주고 방으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생 고양이에게 음식을 줘 본 경험이다.

주인 없는 야생 고양이를 일컫는 표준어는 도둑고양이다. 애묘인들 중에는 도둑고양이 대신 길고양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도둑고양이라는 말이 싫지 않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고양이들은 귀여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가기 때문에 도둑고양이라고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녀석들은 내가 먹으려던 천하장사까지 자기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도둑이 맞다.

옛날 사진을 뒤져보니 그 때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흰 색 바탕에 검은 색 얼룩 무늬가 있던 고양이. 고양이들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아마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인터넷에 보면 고양이한테 잘 해 줬더니 고양이가 쥐나 벌레를 선물로 잡아왔다는 이야기도 많던데 저 고양이들은 내 천하장사를 다 먹어 놓고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입을 싹 닦아 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웃으며 옛날을 추억하게 해 줬으니 이 녀석들은 이미 나한테 천하장사보다 훨씬 큰 보답을 해 준 셈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복덕방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복덕방의 업무는 부동산 매매 중개이지만 보통 복덕방이라고 하면 낡은 가죽 소파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둘러 앉으셔서 장기를 두시면서 짜장면을 시켜 드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복덕방은 그렇게 동네 사람들이 무료할 때 모여서 몇 시간씩 시덥잖은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곤 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쯤 부터인가, 공인중개사라는 말이 복덕방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 부동산 매매라는 업무의 본질은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에는 낡은 가죽 소파와 장기판 대신 회색 합성 수지로 코팅된 합판 책상과 펜티엄 컴퓨터, 육중한 CRT 모니터가 있었다. 누런 색 백열등 대신 눈이 쨍한 형광등이 있었고 짜장면 배달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복덕방(福德房)은 복(福)과 덕(德)이 있는 방(房)이라는 뜻이다. 어감 때문에 구식처럼 보여서 그렇지 사실 뜻이 참 좋은 단어이다. 반면 공인중개사라는 단어에서는 공인(公認)된 중개사(仲介士)라는 뜻 말고는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는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만 어른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 같은 틀에서 볼 때 나는 복덕방이라는 성숙한 단어가 공인중개사라는 유아기적 단어로 퇴행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의 중심이 될 궁궐을 지은 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궁궐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의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 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뜻도 좋으면서 동시에 유교를 나라의 기반으로 하겠다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이름이다. 이처럼 1395년,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 나라의 중요한 건물 이름을 붙일 때에 적어도 고전 한 수는 읆을 줄 알았고 비유와 상징을 사용할 줄 알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사는 곳의 이름은 청와대이다. 청와대(靑瓦臺)는 푸른(靑) 기와(瓦) 집(臺)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써 놓으니까 괜히 뭔가 있어보여서 그렇지, 행인이 길을 가다가 "와 저 집은 지붕이 파랗네" 라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이름이다. 깊은 뜻이나 비유나 상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엮어보려면 유물론하고나 엮일 수 있으려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어휘가 고급스러워지는데 어째 우리말은 요즘 점점 어려지는 것 같다. 복덕방과 공인중개사, 경복궁과 청와대의 차이가 그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제쯤 500년 전으로 성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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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기독교 교리를 수학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시도해 봤습니다.

정의역이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집합이고 공역이 참과 거짓인 함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함수의 이름은 ‘구원’입니다. 수식을 사용해서 써 보면

함수 구원:X -> Y
X = {x | x는 사람}
Y = {참, 거짓}

이렇게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원소나열법으로 쓸 수는 없기에 집합 X를 정의할 때에는 조건제시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함수는 사람이 대입되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를 알려주는 함수입니다. 예를 들어 '구원(철수) = 참' 이라면 철수는 구원받은 것이고 '구원(철수) = 거짓' 이라면 철수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의 집합을 정의역으로 가지는 함수이기 때문에 철수 영희 갑돌이 갑순이를 다 대입해 볼 수 있지만 바둑이는 대입할 수 없습니다. 로그(log)에 음수를 넣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원(바둑이)'는 정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 하면 구원받는가?’ 입니다.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면 고등학교 집합과 명제 시간에 배운 명제함수가 필요합니다. 명제함수란 ‘p(x) 이면 q(x) 이다’ 형태의 문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p(x) 이면 구원(x) 이다

에 해당하는 p(x)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착함(x) 이면 구원(x) 이다' 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공리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주어진 이론 체계 안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면서 증명이 필요없이 참으로 인정되는 명제를 공리라고 하고, 그런 공리들을 모아놓은 것을 공리계라고 합니다. 수학에서는 증명을 할 때 어떤 공리계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한데,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의 공리계는 성경책이 되겠습니다. 공리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지금은 공리계에 있는 명제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참이라는 것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구원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찾고 싶은 구원의 조건인 p(x)에 대해 성경은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사도행전 16:31)” 라고 말합니다. 이건 성경이라는 우리의 공리계 안에서는 따질 필요 없이 참입니다. 이 구절에서 용어를 그대로 따 와서, 어떤 사람이 주 예수를 믿는지의 여부를 알려주는 ‘믿음’이라는 함수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믿음(x) 이면 구원(x) 이다

예를 들어 x에 영희를 대입하면 "믿음(영희) 이면 구원(영희) 이다", 즉 "영희는 주 예수를 믿는다. 그러므로 영희는 구원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나? 즉 위의 p(x)에 믿음(x) 대신 들어갈 수 있는 함수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그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은근 재미있네요 ㅋ
"뭐뭐 한 것 같아요"의 유해성

"뭐뭐 한 것 같아요" 라는 표현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한국어를 좀먹고 있다. 그 유해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명언, 명문, 명대사 등에 "뭐뭐 한 것 같아요"를 붙여 보았다.

이순신: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도는 것 같다.
세종대왕: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것이 불쌍한 것 같다.
공자: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까 참 기쁜 것 같다.
기미독립선언문: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은 독립국인 것 같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것 같다.
카이사르: 온 것 같고 본 것 같고 이긴 것 같다.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블랙 팬서: 와칸다는 영원할 것 같다.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는 것 같다.
마르크스: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할 것 같다.
관우: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올 것 같소.
지드래곤: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는 것 같아.
지하철 안내 방송: 이번 역은 사당, 사당인 것 같습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인 것 같습니다.
용비어천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윤동주: 육첩 방은 남의 나라인 것 같다.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눈물을 안 흘릴 것 같습니다.
히딩크: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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